창세기 8장 강해

창세기 8장 하나님의 딜레마

1-5절 홍수가 그치다.

드디어 홍수가 그칩니다. 하지만 홍수가 그친 것이지 물이 다 마른 것은 아닙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에서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립니다. 8:1-5까지는 비가 그치고 물이 줄어드는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기억하사

‘기억하사’로 번역된 자카르라는 히브리어는 ‘표시하다’ ‘새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을 망각한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가 꿈을 꾼 뒤 그 앞에서 ‘내가 기억한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고난이 깊어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나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람(루아흐)을 불게 하십니다. 드디어 땅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동물들의 코에서 거두셨던 바람(루아흐)를 다시 땅에 되돌려 주십니다.


창문이 닫히고

홍수가 시작될 때 깊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열렸습니다.(7:11) 그러나 이제 다시 그 문이 닫힙니다.(2) 그 문은 하나님께서 여시고, 하나님께서 닫으십니다. 사람의 생사화복의 문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드디어 비가 그칩니다. 비는 분명 축복의 도구지만 그것이 과할 때 저주가 됩니다. 한번 홍수를 겪고 난 후 사람들은 물이 얼마나 무서울까요?


점점 물러가서

하나님은 순식간에 모든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비록 비는 그쳤지만 물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물은 ‘점점’ 물러갑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이 완전히 줄어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6-12일 까마귀와 비둘기


아마도 노아의 방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후대에 전해지면서 더욱 유명해진 것입니다. 바로 까마귀와 비둘기 이야기입니다.

사십 일과 까마귀

‘사십 일’(6)이 지나자 노아가 창문을 엽니다. 그런데 표현이 조금 이상합니다. 5절에서는 열째 달 초하루라고 표현합니다. 그다음 사십일이며 열한 째달 11일 될 겁니다. 그럼 그렇게 표현하면 될 일이지 왜 굳이 40일을 넘었을까요? 그것은 40일이 갖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40일은 고난의 시기 광야의 시기입니다. 물이 줄어드는 기간은 참으로 답답한 시간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드디어 사십 일이 되자 노아는 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 보냅니다.

부정한 까마귀?

까마귀는 율법상 부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합니다. 비록 까마귀가 시체를 먹고 살지만 하나님은 부정한 까마귀를 통해 광야의 길을 떠나는 엘리야를 먹이셨습니다. 역시 그때도 40일의 기간이었습니다.

  • 열왕기상 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왕래하였더라

굳이 히브리어 문법을 찾지 않아도 이 단어는 반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동사도 미완료형으로 반복된 행위를 나타냅니다. 까마귀는 한 번 갔다 오고 만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하늘을 날았고, 방주와 물 위를 오가며 날아다녔습니다. 까마귀가 오가는 시간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7)입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까마귀를 내 보낸 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까마귀가 썩은 시체가 좋아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들어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오래전 어느 성경 주석가에 의해 성경에도 없는 설명을 추가하면서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그대로 받는 것도 문제입니다.


또 칠일을 기다려

노아는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하지만 비둘기는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내 보냅니다. 두 번째 비둘기가 밖에 나갔다 왔을 때 입에 올리브 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들어옵니다.(11절) 그 잎을 보고 노아는 땅에 물이 거의 말랐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칠 일을 기다렸다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이제 더 이상 돌아오지 않습니다.


노아는 계속하여 시도합니다. 까마귀를 보내고, 비둘기를 보냅니다. 한 번 만 보내지 않고 두 번 세 번을 보내 상황을 파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기다려면 될 일이지만 종종 기다림은 게으름이 아닌 부지런한 탐색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3-19절 다 이끌어내라


물이 걷히고

드디어 육백일 년 첫째 달 초하룻날, 그러니까 새해가 밝았습니다. 땅 위에서 물이 걷혔습니다. 노아는 방주 뚜껑을 제치고 홍수가 지난 자리를 봤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실 때까지 방주 안에 머물렀습니다. 너무나 불편하고 답답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노아는 참고 기다렸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리라

둘째 달 스무 이렛날, 노아가 물이 마름을 발견하고도 한 달 27일을 더 방주 안에서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17절) 노아는 이 명령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아야 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17절)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곧바로 이 구절이 아담을 창조한 이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압니다. 히브리어도 동일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꿈꾸시는 것들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창 8:17하반절

창 1:28
번성하고 충만하라

20-22절 노아의 번제

번제로 드렸더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내려와 처음 한 일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게 제사한 것입니다. 정결한 짐승과 새를 취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번제(알라)는 가인과 아벨이 드렸던 제사입니다. 레위기 이전이라 전번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학자들은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아낌없이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제사로서 헌신과 충성을 의미합니다. 역시 노아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회의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신이기 때문에 후회도 하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면 인간적인 감정이 없다고 말합니다. 제발 하나님을 무정(無情)론적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마치 기계 같은 하나님을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도 아파하시고 슬퍼하십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눈물을 보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통곡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들을 우리는 소명자로 부릅니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의 제사를 받으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애착과 후회를 통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사랑은 항상 딜레마를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악은 미워하시기에 악한 인간을 멸해야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완전히 멸할 수도 없는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나가면서

창세기 8장은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는 노아와 인간을 멸하시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아파하시는 하나님은 노아를 보며,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심판하지 않을 것을.이라고 답답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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