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0장 개요
창세기 40장 강해
감옥에서의 요셉 창세기 40:1-15
우리에게 버려진 시간이 있을까요? 그냥 무의미하게 흘러가버린 시간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인생 가운데 이 부분 정말 무의미 한 것 같아! 나에게 다시 그 시간이 주어진 진다면 이렇게 이렇게 살고 싶다는 시절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군대 가는 것을 무척 아까워하고 허비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유익했다고 대체로 남자들은 군대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인생살이 새옹지마입니다. 한 때 좋아 보이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 안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안 좋은 일도 지나고 보면 좋은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현재는 과거에 내가 만들어 낸 이야기의 연장이며, 미래 또한 지금 여기서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지금 나의 삶을 원망할지 감사할지도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조차 내일의 문을 여는 선택이란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성경에서 배워 보기로 합시다. 성경에서 버려진 인생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같이 들어 봅시다. 그 사람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정직한 선택이 좋은 결과 만을 주지 않는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십년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보디발은 시위 대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다면 보디발의 집에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종들과 하인들이 있을 겁니다. 또한 성경에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행사와 경제적인 책무들이 뒤따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셉은 십년 동안 보디발의 집에서 최선을 다해 섬김으로 경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요셉은 그곳에서 피할 수 없는 유혹 앞에서도 자신을 지켜냈습니다.
요셉의 정직한 삶을 우리로 하여금 한시도 하나님 앞에서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 줍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를 유혹을 과감(果敢)하게 뿌리쳤습니다. 그는 현재의 삶에 안일하게 만족하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분노한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사람 앞에서 성실했지만,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우린 여기서 정직하고 올바른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결과로만 이어지지는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때론 정직함으로 인해 손해 볼 때도 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정직한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여전히 정직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오는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연은 없는 법입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보고 우연하게 사서 자기의 종으로 삼았는지 모르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십니다. 요셉 또한 하나님에 의해 버려진 듯하지만,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인류를 향한 구원역사를 하나하나 차분히 진행해 나가십니다. 39:20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그곳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소설에 보면 나중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을 복선(伏線)이라고 말합니다. 복선은 나중에 일어날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보려주려는 작가의 의도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감옥이 하필이면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원어에 보면 20절의 시작은 ‘와우’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와우, 요셉이 왕들의 죄수들이 들어가는 감옥에 들어갔다.
와우의 뜻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고통당할 요셉을 생각하니 불쌍해서 내는 감탄사입니다. ‘세상에 어쩌나 요셉 이제 정말 힘들겠다’로 번역 가능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쁨의 감탄사로, ‘와, 요셉이 그 감옥에서 재미난 일이 일어나겠네’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전자 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다. 안타까움의 소리일까요. 아니면 기쁨의 감탄사일까요?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좋습니다. 그런 두 번째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운명적인 만남 / 만남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다.
40장을 시작하면서 성경기자는 바로의 두 관원이 죄를 범하여 시위대장 집에 있는 감옥에 가둡니다. 3절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성경기자가 뭐라고 쓰고 있습니까?
그들을 시위대장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기가 막하지 않습니까? 그 많은 감옥 중에 요셉이 갇힌 곳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이고, 두 관원이 갇힌 곳도 바로 그 감옥입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원수는 꼭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하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시면서 늘 복선(伏線)을 깔아 놓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둔해서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주의 깊게 묵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 같고, 기적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선택이 변화와 성숙이라면, 하나님의 선택은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만남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어떤 만남은 우리를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만나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사자성어가 말해 주듯 만남은 좋은 영향이듯 나쁜 영향이듯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덕무란 조선의 선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활한 아이와 술 취한 사람, 사나운 말과 미친개는 삼가 피하라.(사람답게 사는 즐거움 159)
이러한 만남은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 사건을 만드십니다. 요셉이 두 관원들과 만났을 때 사건이 만들어집니다. 물론 그 사건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기까지 2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만남이 숙성되면 사건이 되고, 사건이 자라나면 역사가 됩니다. 하나님은 하찮아 보이는 만남을 통해 역사의 축을 돌려 버립니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만남은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저는 오늘 밤 여러분의 삶 속에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사건으로 들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성숙해 가는 요셉
철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어릴 때는 자기 밖에 몰랐는데 철이 들면 다른 사람을 보는 힘이 생기는 것이죠. 즉 배려하는 여유입니다. 나이는 절로 먹지 않습니다. 요셉은 시간이 지나면서 분별력도 생기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있습니다.
요셉은 집에서 정의롭고 똑똑했는지는 모르지만 타인을 배려하지는 못했다. 즉 혼자 잘난 맛에 살았지 다른 사람을 이끄는 힘은 없었습니다. 리더의 자격은 팔로우입니다.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는데 리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은 감옥을 돌보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관원들을 아침에 일어나 살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집을 있을 때 요셉의 모습과 얼마나 다르지 보십시오. 성숙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으로 변해 있습니다. 이제 감옥에서 나갈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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