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첫 번째 살인
창세기 4장은 인간의 타락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뱀의 말을 듣고 손을 내밀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타락 이후 아담과 하와는 영적인 죽음, 관계의 죽음, 육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제 4장에서는 죄성을 가진 자녀들을 통해 죄가 어떻게 열매 맺는가를 보여줍니다. 4장에서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만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사가 어떻게 해서 드려지게 되었고, 제사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입니다.
구조 분석
- 1-15절 제사와 살인
- 16-24절 가인의 그 후손들
- 25-25절 셋과 에노스
1절 서론
아담이 하와를 알다
1절은 4장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동침이자 새로운 시작을 담고 있습니다. ‘동침’은 히브리어 ‘야다’로 알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야다는 체험적 앎이라는 개념으로 너무 과하게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한 몸을 이루라'(2:24)는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에덴동산 안에서는 동침이 없었는지 질문할 필요 있어 보입니다. 성이 마치 타락의 결과라고 우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조 시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최초의 동침은 에덴동산 밖에서 일어납니다.
하와가–낳고
1절 후반부는 4장 전체를 이끄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5장은 ‘아담이…낳아'(5:3)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4장은 ‘하와가 낳고’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3장에서 하와가 주도하여 타락이 일어났을 상기하고 4장에서도 여전히 하와가 주도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나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번역된 한글성경은 별다는 느낌이 없어 보이지만 히브리어는 약간 다른 의미가 부여됩니다. 즉 하와 하나님을 이용해 자랑하는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죠. 어떤 학자는 ‘낳아(히, 카나)를 ‘창조했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와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인을 낳았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처럼 나도 사람(가인)을 창조했다’의 의도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하와의 숨겨진 교만은 가인의 교만과 이어지고, 결국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2-5절 상 가인과 아벨의 두 제사
가인과 아벨
아벨을 낳았다가 아니라 ‘가인의 아우 아벨’로 소개합니다. 아벨은 이름 자체가 허무이듯, 하와의 눈에 아벨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먼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 부분은 유의해야 합니다. 아벨은 양은 치고, 가인은 농사를 합니다. 농사는 ‘땅을 섬기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드’가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처음 아담아게 주신 소명 ‘경작하라'(2:15)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아바드는 동사로 사용되면 섬기다의 뜻이다. 명사형이 되면 ‘종’ ‘노예’가 됩니다. 창세기 기자는 아담의 농사에 대해 매우 부정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양을 치다는 ‘지키다’ ‘보존하다’의 ‘라아’인데 시편 23:1에서 명사형으로 ‘목자’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즉 그는 양을 지키고 돌보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인과 제물의 제물에 대해 극단적 대조와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입니다.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극단적 비교입니다. ‘첫’은 머리’ 최고, 가장의 어미로 가장 좋은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가인은 첫 소산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차이를 ‘믿음’으로 드렸는가 아닌가로 비교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깊이 논할 수는 없지만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의 제사란
믿음은 자신의 신념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제사하지 않았고, 아벨은 계시에 순종했습니다. 제물은 히브리어 민하(מִנְחָה)인데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중의 하나인 곡식 제물인 소제입니다. 하지만 아벨의 제물도 동일하게 ‘민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절차상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단지 가인의 문제일까요? 성경은 명확하게 답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5절)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제물의 문제뿐 아니라 가인의 전인격적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물은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산 제사여야 합니다. 삶이 없는 제사는 우상숭배입니다. 가인은 경건한 삶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믿음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삶을 살지 않았다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가인은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고, 삶도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화려한 제사, 세밀한 제사 방식, 많은 제물. 그런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십니다.
-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5 하-15절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가인의 분노
4장의 핵심이라할 수 있는 가인의 살인 사건은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자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살인과 전쟁의 전조 또는 암시하는 사건입니다. 가인에게 분노가 일어납니다. 최초의 분노입니다. 분노는 자신의 뜻대로 뭔가 되지 않을 때 나오는 반응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신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법과 질서를 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인은 교만하고 악합니다. 그러한 가인을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가인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죠. 가인의 분노 안에는 하와의 교만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악한 생각입니다.
가인과 대화하시는 하나님
참으로 기이하고 아이러니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찾아가지 않고 가인을 찾아갑니다. 우는 아들 떡 하나 더 주는 격이죠.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로 가면 아버지는 자신을 종 취급하며 회개하는 둘째 아들에게 찾아가지 않고 분노하는 첫째 아들을 찾아가 대화합니다. 가인의 사건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가인은 거짓된 경건주의자요 하나님께 분노하는 악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가셔서 가인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가르치시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결정적인 답은 ‘네가 선을 행하면’에 있습니다.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또 하나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 앞에서 엎드리고 있다고 너를 덮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벨을 쳐 죽입니다.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라
하나님을 가인을 찾아가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너의 아우 아벨’입니다.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먼저는 아벨은 너무나 입지가 좁다는 뜻입니다. 즉 아벨은 ‘너-가인’의 동생일 뿐입니다. 장자도 아니고, 부모님께 사랑받는 존재도 아닌,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동생을 왜 죽였느냐고 묻습니다. 다른 하나는 ‘너의 아우’이기에 ‘네가 돌봐주고 지켜워야할 존재’이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죽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권력으로 힘없는 자를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질문에-엄밀하게는 질책에-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난 몰아라요 내가 왜 동생을 지켜야 합니까?’ 여기서 지키다는 ‘솨마르(שָׁמַר)’로 순종하다 보존하다 따르다의 뜻입니다. 여기에 숨겨진 의도가 드러납니다. 조금 의역하면 ‘왜 내가 아벨이 하는 행동을 따라야(모방) 합니까’가 됩니다. 내 삶은 내가 정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벨의 삶은 아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른 삶이었습니다. 마치 여로보암의 길과 다윗의 길이 다른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가인을 저주하십니다. 그 저주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입니다. 즉 떠돌이 생활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에 정착해야 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유리하다죠. 가인의 존재 자체가 파괴됩니다. 결국 그는 땅에서 늘 떠돌아다니는 저주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 땅은 영적인 땅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벌을 마다하고 놋(유리하다의 뜻) 땅에 성을 쌓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본문 강해]
1-15절 제사와 살인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했습니다. 동침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알다(야다)’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임신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둘째를 낳고 아벨이라고 불었습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인을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굉장히 겸손해 보이지만 ‘내가… 얻었다’가 주요한 내용인 것을 감안하면,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나서 자신이 하나님처럼 어떤 존재를 ‘창조했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이란 이름은 ‘허무’라는 뜻입니다. 아벨이 진짜 이름인지 모세의 문학적인 표현인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어쨌든 가인과 아벨은 이름에서 너무나 대립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기르는 목동이었습니다. 4장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지만 족장시대로 들어가면 농사는 가나안 사람들의 직업이고, 목동은 족장들의 직업입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이러한 성향을 감안하고 읽어 나가야 합니다.
자, 어쨌든 ‘세월이 흐른 후에’(3절)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립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는 ‘1년 후에’이란 뜻도 됩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로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히브리서 말씀을 가져와 ‘믿음의 제사’와 그렇지 낳는 제사로 구분할 수도 있고, 구약의 제의를 생각하며 ‘피 있는 제사’와 ‘피 없는 제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5절) 않았습니다. 창세기는 이 부분에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억지로 해석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하나님은 에덴동산 밖에도 계신다.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돌아다니며 불타는 양날 검으로 입구를 막았습니다. 또한 천사가 문지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께 자력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리는 곳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4:23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힘이며, 은혜입니다. 오늘도 이곳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둘째, 가인의 살인의 특징
두 번째는 아벨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이것이 너무나 분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조용히 들로 불러내어 때려죽였습니다.(8절)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이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6-7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경고했고, 죄를 너를 다스리려고 하나 오히려 죄를 지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고, 죄에게 지배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 지키라(샤마르)라는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뱀의 음성에 청조한 아담과 닮아 있습니다. 시편 1편 1절을 보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이들은 악인의 꾀를 귀담아 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듣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악한 자의 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말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야 합니다. 나는 괜찮아! 나는 그런 말을 들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악한 자와 결탁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죄를 피하지, 죄를 이기지 않습니다.
죄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무시할 만큼의 작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둡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죄는 점점 커지고 영향력은 더욱 강해집니다. 마지막에는 죄가 그 사람을 완전히 정복해 버립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죄의 노예가 되어 영원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러한 악의 성향은 가인의 대답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은 가인을 한 더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대답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절)
자 보십시오. 가인의 대답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아담의 음성이 가인의 대답 속에 있고, 좀 더 강력해진 악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아담은 죄를 부정하지 않고 다만 핑계를 댔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살인을 하고도 ‘나는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23-24절을 보면 라멕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런데 라멕은 가인보다 더 악한 자입니다.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했고, 자랑했습니다. 죄가 점점 자라나 세상을 뒤엎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창세기 5장의 족보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지키지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악이 세상에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결국 노아의 홍수를 통해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셋째, 죄의 대가
하나님은 가인에게 땅에서 유리하는 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이 수고한 대로 열매를 내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에게는 정착하지 못하고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면에서 쫓아내는 것을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땅은 가인이 경작하여 곡식을 냄으로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땅을 통해 가인을 삶의 자리에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일터가 곧 하나님의 얼굴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보존하지 못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넷째, 은혜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가인의 표’를 허락하십니다. 그 표는 가인을 보호하는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존 H. 월튼은 가인의 표를 ‘아담과 하와가 받은 옷’과 비교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심으로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이 잘못했음에도 끝까지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바로 이끌어 주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가인은 하나님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징계를 벗어 버리고 ‘놋’ 땅에 거주하고 그곳에 자신의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성을 쌓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유리하는 벌을 내리심으로 저주를 지고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가인을 떠나지 않음으로 보호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리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거부하고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성을 쌓은 ‘놋’땅은 ‘유리하는 곳’이란 뜻을 가진 장소였습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의 지혜로움은 하나님 앞에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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