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9장 개요
창세기 39장, 하나님의 망각
우리는 지난주 창세기 39장에서 요셉이 비록 형들의 손에 팔려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케 되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형통케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인도하고 있으며, 요셉의 꿈을 하나님께서 집적 만들어가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만 주시고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꿈을 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그 꿈을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요셉의 꿈은 요셉의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요셉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전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붙들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잇다. 형통이란 이 세상에서의 성공, 출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충성된 사람이었다. 성실한 종이었으며, 최선을 다해 주인을 섬기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썻으며,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감옥 안에서도 형통하였다고 보고합니다.(23)
감옥에서의 형통? 뭘까요?
우린 여기서 형통의 의미를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은 전혀다릅니다. 세상적 기준에서 요셉은 실패자요 낙오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자요 정말 재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러한 요셉을 향하여 형통(亨通)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관점(觀點)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意味)의 형통(亨通)은 인간의 욕망(慾望)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과 비젼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형통(亨通)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무시당하고, 때로는 눈물나도, 형통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배신과 하나님의 유기 속에서도 여전히 형통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 하나 이루지는 것입니다. 궁극적 하나님의 형통은 온 인류가 구원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와 무릎 꿇고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40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망각(妄覺)이라는 수단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분명 역설이요, 아이러니요, 신비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원대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역설과 신비를 풀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절대 절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창세기 40장은 바로의 두관원장 떡,술맏은 관원장이 범죄하여 감옥에 갇힌다. 3절에 보니 그 감옥은 요셉이 갇힌 바로 그 감옥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들이 감옥에서 꿈을 꾸게 되는데 그 꿈 때문에 심히 괴로워 했다는 것입니디ㅏ. 이 꿈은 보통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입니다. 개꿈과 하나님이 주신 꿈이 다른 것은 개꿈은 꾸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꾸게하신 꿈은 그 꿈을 이해할 때 까지는 괴로워서 견딜수 없다는 것입니다. 꿈이 그 사람을 압도해 버리기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꿈을 해석해 주었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8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요셉은 술관원장의 굼을 해석하면서 드디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었습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요셉 속은 모른다는 바로 그 요셉의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요셉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 까요?
14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술관원장은 그를 망각(妄覺)하고 말았습니다.
개역한글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쉬운성경 23 그러나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요셉을 잊고 말았습니다.
NIV 23 The chief cupbearer, however, did not remember Joseph; he forgot him.
NTL 23 Pharaoh’s chief cup-bearer, however, forgot all about Joseph, never giving him another thought.
슬픈 일입니다. 요셉은 아마 이 일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와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왜 요셉은 남의 꿈은 그렇게 정확하게 해석하면서 자신의 꿈은 풀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전의 어떤 선교사님, 병고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분이 기도하고 안수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병에서 나음을 얻었고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교사님은 벌써 10년이 넘도록 고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선교사님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바울도 역시 이러한 문제로 고통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탁월한 믿음과 영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큰 능력으로 병을 고치기도하고, 심지어는 죽은자를 살리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이야 말로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고, 병이 낫기를 기도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NIV
7 To keep me from becoming conceited because of these surpassingly great revelations, there was given me a thorn in my flesh, a messenger of Satan, to torment me.
8 Three times I pleaded with the Lord to take it away from me.
9 But he said 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Therefore I will boast all the more gladly about my weaknesses, so that Christ’s power may rest on me.
10 That is why, for Christ’s sake, I delight in weaknesses, in insults, in hardships, in persecutions, in difficulties.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NLT
7 even though I have received such wonderful revelations from God. So to keep me from becoming proud, I was given a thorn in my flesh, a messenger from Satan to torment me and keep me from becoming proud.
8 Three different times I begged the Lord to take it away. 9 Each time he said, “My grace is all you need. My power works best in weakness.” So now I am glad to boast about my weaknesses, so that the power of Christ can work through me. 10 That’s why I take pleasure in my weaknesses, and in the insults, hardships, persecutions, and troubles that I suffer for Christ.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중이 제머리 못깍는다는 말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가요? 원하시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목말라 하셨으며, 배고파하셨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심지어 오해와 비방 속에서 십자가에서 못박히고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역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이야 말로 신비(神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우리는 창세기 40장을 보면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지혜로운 요셉이 왜 망각(妄覺)되어야 합니까? 믿음의 사람. 지혜의 사람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아니 어느누가 온 세계를 삼키려는 7년의 대 기근에서, 감옥 속에 있는 히브리 노예가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니 어떻게 감옥에서 썩어가는 이방인 노예가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무도 알지 못했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늘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보십시오.
고전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분명 홍해는 장애물입니다. 분명 홍해는 거대한 골칫거리입니다. 홍해는 분명 우리에게 고통이요, 슬픔의 끝자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이 기적의 장소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는 계시의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적으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홍해를 보며 드넓은 바다가 보았습니다. 넘실거리는 파도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해 속에 구원의 길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셉은 반드시 망각되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있습니다.
마치 밀가루 서말 속에 숨겨진 누룩처럼 말입니다.
또한 이것은 보이지 않는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땅 속에 깊이 숨겨진 보화(寶貨)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에 알려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을 잊었습니다. 망각한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요셉을 망각할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세상은 요셉을 감옥에 있는 별 볼일 없는 히브리 노예로 보았지만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로 보셨습니다.
그것이 요셉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요셉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꾸게하신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자는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있는 자는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잊지 않습니다. 아니 잊지 못합니다. 잊은 것이 아니라 잠깐 숨겨둔 것입니다. 큰 폭풍이 지나도록 숨겨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 쓰시기 위해 귀한 보화를 땅 속에 묻어둔 것입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무시하든, 하찬케 여기든, 왕따시키든 상관하지 말고 용감하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까지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아 도는 분이 있다면 교회로 오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때가 중요한 시기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신세타령할 때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보잘 것 없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무시하는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생은 항상 이런 것입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법입니다. 원수를 만들지 마십시오. 나중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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