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장 강해

약속의 땅에 심은 소망, 창세기 23장 강해

창세기 23장은 사라의 죽음과 장례를 기록한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가장 큰 약속이 이루어진 직후,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시험을 통과했지만, 창세기 23장에서는 사라의 죽음 앞에서 울며 슬퍼합니다.

이 장은 매우 현실적인 본문입니다. 여기에는 기적도, 천사의 방문도, 극적인 신탁도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죽고, 남겨진 사람이 울며, 장례를 치르기 위해 땅을 구입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됩니다. 사라가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죽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살아 있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사라를 묻기 위한 무덤을 마련합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여전히 나그네였지만, 그 땅에 자신의 가족을 묻을 한 조각의 땅을 소유하게 됩니다.

창세기 23장의 중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믿음은 죽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듭니다. 아브라함은 울었고, 장사했으며,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 속에는 약속의 땅과 부활의 소망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슬픔|창세기 23장 1-2절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연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였더라

사라는 127세에 죽었습니다. 성경은 사라의 나이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유일한 여성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으므로, 사라는 이삭을 낳은 뒤 약 37년을 더 살았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이미 어느 정도 자란 아들로 등장합니다. 사라는 이삭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았고,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의 여정을 걸었습니다. 이제 사라는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습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제단을 쌓았고, 하나님과 교제했으며, 나그네로 살아왔습니다. 사라는 바로 그 땅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였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죽은 사람을 위해 가슴 아파하며 깊이 애도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다는 이유로 슬픔을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라의 죽음 앞에서 울었습니다.

성경은 믿음과 애통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장례식장에서 울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의 슬픔도 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아셨지만, 죽음이 인간에게 가져온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애도는 믿음 없는 행동이 아닙니다. 슬픔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가져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눈물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힘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슬퍼했고 애통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서도 장례를 준비하고, 약속의 땅에 사라를 묻을 장소를 찾았습니다.

신앙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실제이고, 이별은 아프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우리의 삶을 흔듭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세기 23장 3-6절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히브리어로 ‘게르’와 ‘토샤브’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는 그 땅에 머물고 있지만 본래 그 땅의 시민이나 토지 소유자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그는 그 땅을 소유하지 못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남의 땅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지만 아직 그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땅에 살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한 땅은 한 조각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 땅에서 힘 있는 왕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억지로 주장하지 않고, 헷 족속에게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라는 말은 무덤으로 사용할 땅을 구입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아무 곳에나 묻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라의 시신을 존중할 수 있는 장소를 원했습니다. 장례는 단순히 시신을 처리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존엄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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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인간의 몸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지만, 그 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장례는 죽은 이를 존중하고, 유가족이 슬픔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소망을 고백하는 행위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초라한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궁극적인 소속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에 살았지만, 가나안이 그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던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땅의 삶을 무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무덤을 구입했고, 장례를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땅의 삶을 무책임하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맡겨진 생명과 관계와 책임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이지만 무관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 땅에서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과 평화를 이루며, 정직하게 일하고, 죽은 이를 존중하며 살아갑니다. 나그네 의식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르게 하는 신앙입니다.

헷 족속의 호의와 아브라함의 증언|창세기 23장 6절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단순한 떠돌이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에서 어떤 힘과 위엄을 보았고, 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창세기 21장에서 아비멜렉도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23장에서는 헷 족속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 인정합니다.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여러 차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흔적이 있었습니다.

성도의 증언은 한 번의 성공이나 말솜씨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결국 사람들의 평가를 결정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에서 무엇을 말하는지뿐 아니라, 가정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돈을 어떻게 다루는지,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갈등 속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지켜봅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과 거래했고, 관계를 맺었으며, 땅에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속에서 구별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거룩함은 아닙니다. 거룩함은 세상 가운데 살면서도 탐욕과 거짓과 폭력에 지배받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호의를 받았지만, 그들의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매장지를 분명히 말합니다. 신앙인은 겸손해야 하지만 무기력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감사히 받을 수 있지만, 자신의 책임과 필요를 분명히 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에브론과 막벨라 굴|창세기 23장 7-11절

에브론이 헷 족속 가운데 앉아 듣고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리하지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그것을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은 에브론에게 막벨라 굴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에브론은 처음에는 그 밭과 굴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거래 방식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실제 무상 증여인지, 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정중한 표현인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토지를 무상으로 주는 일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습니다. 토지에는 가족과 가문의 권리, 세금과 책임, 사회적 관계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에브론의 말은 공개적인 협상과 체면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밭의 값을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은 사라를 묻을 장소를 선물로 받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장례의 장소가 단순히 호의로 빌린 땅이 아니라, 정당한 거래를 통해 영구적으로 소유한 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 앞에서 공개적으로 거래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훗날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개인적인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공동체 앞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앙은 정직한 절차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계약과 법과 질서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은 공적인 책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믿음은 불투명함과 편법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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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 땅을 자기 후손에게 주실 것을 믿었지만, 그 약속을 핑계로 현재의 법과 사람들의 권리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래의 약속을 믿으면서도 오늘의 절차를 존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고 해서 인간적인 책임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고, 합당한 값을 지불하며, 이웃의 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사백 세겔의 은과 값을 지불하는 믿음|창세기 23장 12-16절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에브론이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대답하여 이르되 그 밭의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에브론은 밭과 굴의 값을 은 사백 세겔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정확히 환산하기는 어렵지만, 당시로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금액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흥정하지 않고 그 값을 지불합니다. 그는 에브론이 제시한 금액을 공개적으로 달아 줍니다. 본문은 이 거래가 헷 족속 앞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반복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장례를 서둘러 처리하기 위해 값싼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정성스럽게 장사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돈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산을 늘리는 일이 중요해 보이지만, 죽음 앞에 서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되돌릴 수도 없으며, 죽음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돈을 사용하여 죽은 사람을 존중하고, 가족의 장례를 준비하며, 공동체 안에서 정당한 책임을 다했습니다.

성경은 물질 자체를 악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물질이 하나님보다 우선되면 우상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정직하게 사용하면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몸을 굽혔고, 정중하게 대화했으며, 정당한 값을 지불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동시에 사람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처리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장례는 단지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이별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막벨라 굴을 소유한 아브라함|창세기 23장 17-20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그 속의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아브라함은 마침내 막벨라 굴과 그 밭을 소유하게 됩니다. 본문은 밭과 굴과 나무와 경계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의 배경 설명이 아니라, 실제 법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소유한 첫 번째 토지는 살아 있는 동안 거주할 넓은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묻을 작은 밭과 굴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온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그 땅 전체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것은 막벨라 굴과 작은 밭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땅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그곳에 묻었고, 훗날 아브라함 자신도 그곳에 묻혔습니다.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도 그곳에 장사됩니다.

막벨라 굴은 한 가족의 무덤이 되었지만, 동시에 언약의 땅에 대한 믿음의 증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그 땅에 묻음으로써 이렇게 고백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은 내가 나그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죽음의 장소가 약속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무덤은 인간적으로 보면 끝을 상징하지만, 아브라함에게 막벨라 굴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었습니다. 이는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삶은 자녀를 낳는 일로만 평가되지 않습니다. 사라는 약속을 기다렸고, 이삭을 낳았으며, 아브라함과 함께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약속의 땅에 묻혔습니다.

성경은 죽은 사람을 이름 없는 존재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녀의 나이가 기록되고, 그녀의 죽음이 애도되며, 그녀의 무덤이 보존됩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가치는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기억되고, 장례와 추모를 통해 그 삶의 의미가 공동체 안에 남습니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부활의 소망

창세기 23장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부활의 소망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막벨라 굴에 묻었지만, 그가 기대한 것은 무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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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나안 전체를 소유하지 못했고,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이 죽은 뒤에도 계속될 것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은 채 죽었으며,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사모한 것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례는 이 땅의 삶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사라를 땅에 묻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무덤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실제로 존재하고, 인간의 몸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죽음을 마지막 말로 두지 않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소망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과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장례는 단순한 끝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잠의 의미를 갖습니다. 죽은 성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안식하며, 마지막 날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막벨라 굴은 부활을 직접 설명하는 교리문서가 아니지만, 약속의 땅에 묻힌 족장들의 무덤은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신앙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창세기 23장은 먼저 슬픔을 억누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성도는 울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슬픔을 빨리 끝내라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여 유가족의 눈물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믿음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우셨고, 아브라함도 울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나그네로 살아가되 책임 있는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이 자신의 영원한 본향이 아님을 알았지만, 장례를 정성껏 준비했고, 정당한 값을 지불했으며, 공동체의 절차를 존중했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이 땅의 삶을 함부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맡겨진 관계와 직업과 가정과 공동체를 성실하게 돌봅니다.

셋째로, 신앙은 정직한 절차를 존중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는다는 이유로 땅을 강제로 빼앗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래를 공개적으로 진행했고, 값을 지불했으며,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권리와 법과 질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불투명한 거래와 편법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공적인 삶에서 정직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넷째로, 작은 소유라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전체를 소유하지 못했지만, 막벨라 굴 하나를 소유했습니다. 그 작은 땅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진 일이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큰 성공도, 넓은 영향력도, 세상이 알아주는 업적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작은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가정을 지키고,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한 자리에서 정직하게 사는 일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소중합니다.

마지막으로, 죽음 너머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땅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온 모든 사랑과 수고와 믿음이 무의미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기억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소망으로 완성하십니다.

결론|울며 장사하고 약속을 붙들다

창세기 23장은 사라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막벨라 굴의 소유권 확정으로 끝납니다. 이 장에는 기적보다 눈물이 많고, 설교보다 침묵이 많으며, 환상보다 현실적인 거래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 속에서 믿음은 살아 움직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사랑했기에 울었습니다. 그는 사라를 존중했기에 장례를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약속의 땅에 사라를 묻었습니다. 그는 나그네였지만, 그 땅에 믿음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사라의 죽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삭은 살아 있었고, 언약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라는 무덤에 묻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무덤에 묻히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삶의 한 장이 끝나는 경험을 합니다. 죽음과 이별 앞에서 우리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슬픔의 자리에서도 자신의 언약을 이어 가십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집과 재산과 명예와 육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 사랑과 믿음과 수고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례를 치르되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되 하늘의 본향을 기억해야 합니다.

막벨라 굴은 죽음의 장소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장소였습니다. 성도의 무덤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끝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활을 기다리는 자리입니다.

사라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죽음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맡겨진 삶을 정직하게 감당하며, 죽음 너머의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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