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개요
창세기는 1장은 성경의 시작이자 창조에 대해 다룬다. 창소는 6일 동안 이루어지면 7일째 안식하심으로 창조가 마무리 된다. 창조는 7일의 시간 동안 완성되며, 현재의 일주일의 개념이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6일의 창조는 대칭을 이루면서 텅 빈 상태에서 채워지는 상태로 나아간다. 창조의 끝은 인간이며, 이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창조를 마무리 된다.
창세기 1장 구조
- 1-2절 창조의 개요
- 3-5절 첫째날의 창조
- 6-8절 둘째날의 창조
- 9-13절 셋째 날의 창조
- 14-19절 넷째 날의 창조
- 20-23절 다섯째 날의 창조
- 24-31절 여섯째 날의 창조
창세기 1장 주해 및 강론
1-2절 창조의 개요
태초에 – 창조하시니라
1절은 1장의 전체의 요약이자 개론이다. 천지(하샤마임 하에레츠)는 피조물 전체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구절 이후 땅(에레츠)의 창조는 등장하지 않으며, 지구가 있는 것을 전제하며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태초에(베레쉬트)는 집의 ‘벧’과 머리 ‘로쉬’의 합성어로 처음을 뜻한다. 처음은 시작을 의미하며, 시작은 끝을 전제한다. 벧은 장소 뿐 아니라 어느 공간, 지점, 시간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창조로 말미암아 역사는 시작되었고, 시작은 곧 창조를 말한다. 존재는 시간을 의미한다. 신이 아닌 모든 존재는 시간이 필요하며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 뿐이다. 그러므로 신은 영원한 존재이다.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 즉 신에 의해 창조 되어야 한다.
‘창조하다’의 ‘바라’라는 동사는 오직 하나님의 창조 때에만 구별하여 사용한다. 창조는 없던 것이 생겨나는 근대적 개념이 아니다. 창조는 곧 하나님의 발설에 의한 것으로,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말씀이 곧 존재다. 존재는 말씀으로 창조 되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곧 존재이다. 요한이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로 표현하는 것은 말씀은 창조 되지 않았으며, 존재의 본질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처음에'(아르케)는 신적 표현이다.
혼돈 공허
땅(에레츠)는 혼돈(토후)하고 공허(보후)하다. 혼돈은 무질서하다는 뜻이며 공허는 비워진 상태이다. 창조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공허에서 충만으로 나아간다. 6월의 창조는 정확히 대칭적으로 진행된다. 홍수 이후 혼돈과 공허, 유대가 바벨론의 멸망 이후 혼돈과 공허가 사용된다는 것은 분명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는 반창조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후에 셋째 날 바다의 솟아난 땅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루아흐는 바람 또는 영으로 번역된다. 둘 사이는 정확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다. 한글성경은 때로는 바람으로 때로는 (하나님의) 영으로 번역하지만 히브리어는 둘 다 루아흐이다. 흑암과 깊음, 수면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셋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원시적 상태를 뜻하다. 통제 불능의 상태 또는 어둠의 영이 지배하는 곳으로 응용된다.
원시적 바다는 비록 인간의 통제 밖이지만 하나님께는 통제 안에 있으며 지배를 받는다. 후에 원시적 바다는 출애굽 당시 홍해로, 욥기에서는 리워야단이 지배하는 곳으로 소개된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통제 불능의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발도 딛고(지배 정복) 걸어 오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인해 원시적 바다를 발로 밟는다. 안타깝게 빠지고 말지만.
3-5절 첫째날의 창조
빛이 있으라
첫째 날은 빛을 창조한다.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다. 말씀이 발화되면 ‘빛은 있다’. 생긴다가 아니라 그냥 ‘있다’이다. 기묘한 표현이다. 말씀과 존재가 하나님을 분명히 한다.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후에 ‘비추라’로 사명이 주어진다. 사명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분명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지어졌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다’는 토브이다. 토브는 종종 영어로 선(good)로 번역되지만 부족함 없는 완벽한 상태의 충족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된 피조물을 보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 되었음에 대한 평가이다. 인간적인 선의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차라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바울의 표현이 더 적합하다.
6-8절 둘째날의 창조
물과 물고 나뉘라
창조는 나뉘는 것이다. 첫날은 빛과 어둠이 나뉜다. 둘째 날은 무언가를 만들지 않고 물이 나뉨으로 공간이 만들어진다. 나뉨은 구분이며,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소명은 각자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만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물의 분리는 물이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수의 심판과 물의 합쳐짐은 창조의 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궁창을 하늘이라
궁창은 공간이다. 맥락상 궁창은 대기권 안의 하늘(샤마임)을 뜻하지만 히브리어 궁차(라키아 רָקִיעַ)은 15절, 16절에서 사용됨으로 대기권 안이 아니라 그냥 비워진 공간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에스겔 1:24,25,26에서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히브리인들이 하늘은 삼층천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하늘(샤마임)은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후 하늘은 종종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하늘을 열고(원어는 찟고) 강림하신다고 표현하다. 하늘은 종종 놋처럼 단단해져 하나님의 은혜가 닫히기도 한다.
9-13절 셋째 날의 창조
뭍이 드러나라
셋째 날은 물 속의 땅이 드러나다. 땅은 둘째 날 생긴 공간 안으로 들어와 자리한다. 창세기 1장에서 공간은 후에 사람들이 거할 공간, 거처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뭍’은 마른 땅으로 히브리어 ‘야바샤(יַבָּשָׂה)’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후에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홍해와 요단을 건널 때 딛은 그 마른 땅(יַבָּשָׂה)이다.(출 4:9, 14:16, 22 수 4:22)
물과 물이 분리되어 뭍이 드러나고, 물은 모여 바다가 된다. 뭍을 땅(에레츠)로 부른다. 에레츠는 사람들이 거할 땅, 즉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말하며 물 속에서 나온 선물로 주어진 사람이 거할 장소로서의 땅이다.
나무를 내라
땅에게 명령한다. 땅은 ‘씨'(제라)의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야 한다. 땅이 할 일 공허한 곳이 아니라 채워져야할 공간이다. 성경에서 씨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창세기 4:251에서 아벨의 죽음 이후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고 셋을 낳고 ‘다른 씨’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 말이 동일한 제라이다. 씨는 이전 세대를 보존하면서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수단인 셈이다. 하나님은 씨를 통해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죽음과 축복을 끊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가시는 축복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신다.
14-19절 넷째 날의 창조
하늘의 궁창에
넷째 날은 첫째 날과 대응한다. 첫째 날 빛을 만드신다. 이제 넷째 날은 또 다른 빛이 공간에 채워진다. 넷째 날의 광명체들은 확실히 지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빛의 형체가 소개된다. 이들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룬다. 시간의 변화를 관장한다. 하늘의 별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 말한다. 고대 사람들은 각 사람에게는 자신의 별이 있다고 생각했다. 육신은 썩어지지만 영혼은 자기의 별로 돌아간다 생각한다. 별은 에스겔과 다니엘,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하는 영적 존재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려진다.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낮의 해와 밤의 달은 파괴적 존재이다. 이들은 하늘에서 땅을 지배한다. 하나님은 이들로부터 택하신 백성들을 지키신다.
- 시편 121: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20-23절 다섯째 날의 창조
다섯째 날은 물과 궁창을 채우신다. 물은 물고기를 하늘(궁창)에는 새들로 채우신다. 다섯째 날은 두 번째 날과 상응한다. 두 번째 날은 물을 갈라 사이를 궁창(공간)을 만드십니다. 갈라진 물의 공간(궁창)에 새로 채우고, 아래의 물에 물고기를 두신다.
새들은 궁창을 날지만(20절) 땅에 거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22절에서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명하신다. 하늘은 날 수는 있지만 거주 공간은 아니다. 거주할 수 있는 곳은 땅과 물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물속이 아니라 땅에 주목하고 계시며, 창조의 중심은 역시 땅이다.
24-31절 여섯째 날의 창조
여섯째 날은 동물과 사람을 창조한다. 땅을 내라 생물을. 생물은 히브리어 ‘네페쉬'(נֶפֶשׁ)다. 이후 이 단어는 깊은 영혼의 관계를 뜻할 때 종종 사용된다. 동물에 대한 창조는 ‘땅은 ~ 내라’로 셋째날과 상응하며, 동일한 패턴을 사용한다. 셋째날도 뭍을 드러나게 한 후 땅게 내라 명한다. 여섯째날 역시 동물을 창조하며 땅에게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의 중심에 ‘땅'(에레츠 אֶרֶץ)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해 보여준다.
동물의 창조 이후 곧바로 사람의 창조로 이어간다. 특이하게 사람의 창조는 유독 정성을 들이고 있다. ‘우리’라는 표현과 ‘형상’ ‘모습’은 복사하다는 뜻이다. 붕어빵을 구울 때 틀에 넣고 비슷한 형태로 계속 만드는 것처럼 ‘형상’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틀로 찍어낸다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뜻인 것이다.
복을 준다는 말은 구약적 의미에서 물질적 것과 직결되지만 ‘구분’ 또는 ‘구별’ 되는 것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특히 2장의 안식일 개념이 그렇다. 복은 종종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된 백성들에 부여하는 존재성 속성과 연관이 있다. 즉 특별한 관계로 여기고 그것들을 아낀다는 의미이다.
다스리라는 원어는 ‘통치하다’ ‘억압하다’ ‘굴복 시키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께 모든 만물을 복종시키도록 명을 받았다. 그 복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시편 2편)
창세기 1장에서 주목할 것들
하루의 개념
유대인들은 하루를 해가 진 저녁부터 다음날 해가 지기 직전까지로 본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날의 개념 때문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을 통해 하루의 시작을 저녁으로 본 것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표현은 정확히 7번 사용된다. 셋째 날 물속에서 뭍이 드러날 때 사용되지 않고, 6일째 되는 날 두 번 사용되어 7번이 맞춰진다. 대부분의 학자는 이것이 노아의 홍수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땅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좋았다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 창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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