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강해

시편 1편은 시편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시편 전체를 포괄하고 요약하는 핵심 시편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의 종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1편 본문

  •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안지 아니하고
  •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 4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5절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 6절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 강해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안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오 복있는 자여’입니다. 문장의 시작인 ‘아쉐르’는 감탄사이며, 마음의 탄식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절제된 감탄사이며, 복 있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옵니다. 이후의 모든 구절은 1절의 ‘복 있는 자’를 설명하고 옹호합니다.

누군가는 나는 복을 받고 싶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복은 단순히 물질의 복만을 말하지 않지 않습니다. 시편1편에서 설명하는 복은 물질의 복을 뛰어넘어 영적인 복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을 원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릇된 표현으로 사람은 누구나 어떤 모양이든 형태든 복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복은 인간의 본성이자 보편적인 것이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지 않는다.

먼저 복 있는 사람은 세 가지를 하지 않습니다. 먼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안지 않습니다. 세 동사는 점진적이며 점차 확고해 집니다. 처음에 그는 걷고(walk), 서고(stand), 앉습니다.(sit). 그는 결국 피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나아갔다는 말이 됩니다. 소 도둑이 바늘 도둑이 됩니다. 악인들의 작은 꼬임에 넘어가 죄를 짓기 시작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결국 운명이 됩니다. 작은 것이 모든 것입니다.

걷지 않는다.

걷는다는 ‘히브리어’ 할락크’는 동행하다는 뜻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고, 노아와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동행(할락크)했습니다. 동행은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며, 매우 은유적 표현으로 악한 자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처음에 빈그릇과 같습니다. 그곳을 채우는 것이 삶이고 인생입니다. 아무 것도 모를 때는 누군가를 따라하고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배우는 대상이 악인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첫걸음이 중요합니다. 한 번 잘못 시작하면 그것을 바꾸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첫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첫 시작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괜찮아 그냥 흉내 내는 거야’ ‘난 다시 돌아올 수 있어’ 라고 말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돌아오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서지 않는다.

선다는 히브리아 ‘아마드(עָמַד)’는 말은 멈춘다는 말이고, 그 행위를 계속한다는 말입니다. 한 번한 행동이 습관이 되어 계속 그곳에 머물게 됩니다.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앉지 않는다.

‘앉는다’는 ‘아샤브(יָשַׁב)’는 ‘앉다’ ‘거하다’ ‘정복하다’ ‘머물다’ 등의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 술이 사람을 먹게 됩니다. 한 번은 우연히 시작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종속되어 종이 되고 마는 것이죠.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행해서는 안 되고, 좋지 않는 습성을 가지면 안 됩니다. 작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큰 일도 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처음 시작하는 것은 그대로 있지 않고 점차 커지고 힘을 갖게 됩니다. 선을 심으면 의의 열매를 거두지만 악을 심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이 하는 것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그렇다면 복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제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가 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율법은 히브리어 ‘토라’를 번역한 것입니다. 토라는 율법보다 굉장히 포괄적입니다. 교훈에 더 가까운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과 역사를 통해 교훈하시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은 관심이 다릅니다. 저주 받을 자들은 악한 꾀에 관심을 갖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관심을 갖습니다. 결국 작은 씨앗이 뿌려져 그것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멸망 받을 자도 작은 악인의 꾀(조언)에 귀을 기울였듯 복 있는 자는 사소하지만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즐거워하여

즐거움을 뭘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즐거워하면 계속 하고 싶고, 더 갖고 싶어합니다. 누군가는 세상의 명예를 추구하고, 어떤 자들은 황금을, 어떤 자들은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보물을 땅에 쌓지 말라 충고합니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누군가는 보물이 보석이고 권력이고 황금이라 생각하여 땅에 쌓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보물은 구제와 사랑, 믿음이라 생각하여 하늘에 쌓습니다.

무엇을 즐거워하는 지는 그 사람이 누군지를 말해 줍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며 내가 어디에 가장 많은 돈을 쓰며, 시간을 투지하고 마음을 쏟는지를 알면 됩니다. 그럼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율법을 좋아하고, 율법을 사랑합니다.

주야로 묵상

주야 즉 ‘낮과 밤’은 ‘하루종일’을 뜻합니다. 하지만 누가 하루 종일 율법을 묵상 할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하자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은 잠이 들어도 말씀이 그립고, 눈을 떠도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말씀이 지배하는 삶, 하나님의 계명에 종속된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입니다.

‘묵상하다’의 히브리어 ‘하가다’는 그냥 입술로 ‘중얼거리다’는 뜻입니다. 현대에야 글을 눈으로 읽지만 실제 굴은 입으로 읽습니다. 인류 역사상 소리 없이 묵독하는 것은 불과 몇 백 년이 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읽어 보십시오. 낭독의 힘으로 그 어떤 배움보다 강하고 위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니 낮이나 밤이나 늘 그 말씀을 입술로 중얼 거리는 것이죠.

시냇가에 심은 나무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옮겨 심겨진 나무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시냇가에 옮겨 심겨진 나무’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옮기지 않으니 사람이 옮겼을 것입니다. 누가 옮겼을까요? 의인화입니다. 나무는 사람이죠. 그 사람은 강가 즉 생명의 말씀 가까이 갑니다.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강은 어떤가요? 항상 풍성하고 많은 열매를 당연히 맺을 겁니다. 외부적 환경이나 위기에 걱정이 없습니다. 근묵자흑이죠.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집니다. 하지만 반대로 선을 가까이 하면 선을 배우고 행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강은 수분과 영양분을 제공하여 나무들이 시들지 않게 니다. 이처럼 어떤 가뭄과 악조건이 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라는 자들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통 하리로다

형통은 잘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이란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강가에 심겨진 나무는 원 없이 물을 빨아 올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자라고 잎사귀를 열고 철이 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은 원하는 대로 얻게 됩니다.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소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인들은

4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렇지 않다

강력한 부정으로 시작됩니다. 무엇이 그렇지 않을까요? 3절에서 의인들이 형통한 것처럼 악인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절대로. 하지만 1절을 보시면 악인은 점점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형통은 점점 많은 부를 쌓고, 점점 낳은 권력을 쌓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멸망으로 갑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곡물을 취하여 까부를 때의 모습이다. 바람이 불면 알곡은 바로 앞에 떨어지지만 쭉정이와 알곡이 떨어져간 겨는 멀리 날아갑니다. 바람은 위기 또는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흔드실 때 겨는 저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하지만 알곡은 차곡차곡 쌓입니다. 바람이 불기 전까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곧 바람이 붑니다. 우리는 절대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5절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러므로’는 결론입니다. 잘 기억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말을 맞이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안전한 것이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불어 버리면 끝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아직 내가 괜찮으니 괜찮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바람에 불려 갈 것입니다.

의인들의 모임

거룩한 자들의 모임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임에 들지 못함으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6절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들의 길은

마지막은 의인들의 끝을 보여줍니다. 의인들의 걷는 길은 비록 좁고 협착 하지만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길은 방법이며 습관이며 삶입니다. 그 길은 고착되어 있고, 반복된 삶을 의미합니다.

악인들의 길은

악인들은 결국 망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자 이제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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