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해설
마태복음 9장은 갈릴리 사역의 중요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중풍병자를 비롯하여 혈루증 여인, 죽은 관리의 딸, 두 맹인, 벙어리를 고리치고 살립니다. 10-13절에서 마태를 부르시며,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선언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살리는 사역들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애 모습을 보며주며, 다시 회복시시키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35-38절은 이러한 사역들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기적과 이적은 긍휼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구조
- 1-9절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 10-13절 마태를 부르시다.
- 14-17절 금식 논쟁
- 18-26절 혈루증 여인, 관리의 딸을 살림
- 27-34절 두 맹인과 벙어리를 고치시다.
- 35-38절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다
마태복음 9장의 전체적인 구조는 35-38절을 전제하며, 모든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려는 주님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질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생명을 수여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레위 마태를 향해 ‘나를 따르라’ 하심으로 제자 삼으십니다. 비웃을 사람들을 향해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선언은 마지막 구절에 들장하는 ‘긍휼’과 잘 맞아 떨어집니다. 마태복음 9장은 ‘긍휼’이란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마태복음 9장 강해
1-9절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표현입니다.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왜 중풍병자 본인이 아닌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일까요? 우리는 이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나와 상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많은 것들은 내 주변의 누군가의 기도와 믿음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기적도 당사자가 아닌 경우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려면 본인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중풍병자가 치유함을 받고 계속 건강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
예수님의 선언은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들은 사람들을 기절초풍했을 것입니다.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당하게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는 왜 ‘네 병이 낳았다’가 아니라 ‘죄사함’의 문제냐는 것이죠. 두 번째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첫 번째 의미는 뭘까요?
성경에는 사람들의 질병이 죄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해석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질병은 율법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소외되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하나님은 거룩한 공동체를 보존하려 했습니다.
주님은 그가 죄로 인해 중풍병에 걸린 것을 아시고, 질병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환자 안에 있음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급해 보이는 사건들의 내면을 보면 의외로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문제의 내면을 보시고, 그 문제의 본질적인 것을 해결하신 것입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난제처럼 보이는 5절은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더 쉽다는 말이 아닙니다. 두 가지 문제 모두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돌려 말하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는 말도 못하면서 어떻게 죄사함으로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할 수 없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바로 다음 구절인 6절에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명령에 드러나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이 쉽고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가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걸으라 하시자 중풍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예수님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신성의 발현 때문입니다. 육신이 감추고 있는 신성은 기적을 통해 미미하게 드러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극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시고 그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것이죠.
10-13절 마태를 부르시다.
지나가시다가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태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마태를 부르시기 위해 그곳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처럼 보이는 것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빈다.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은 세관에 앉은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명령하십니다. 마태를 즉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행하신 것들을 보고, 듣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후에 예수님을 본 받아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선생을 닮는 것이고, 선생이 하는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했던 당시에 스스로 거룩하다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목소리로 왜 죄인과 식사를 하냐며 비판합니다. 식사를 같이 한다는 말은 그는 영접한다는 말이며, 친구로 동등하게 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공동체로 받아 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비판한 것이죠.
예수님은 그들의 비판에 대해 다윗의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고 하십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고방식에 매여 예수님을 비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고 되돌아 오기를 원하십니다.
14-17절 금식 논쟁
왜 금식하지 않는가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을 찾아와 ‘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금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굳이 복잡하게 구약의 많은 부분을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금식은 즐거움을 주고 생명에 필요한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자신의 절박함과 슬픔을 하나님께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국가적 어려움이나 개인적인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세기 당시의 금식은 형식이 되어 금식이 마치 신앙의 표준, 경건의 정석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금식을 해야한다는 명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오히려 먹고 마시며 즐거운 생활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모습이 너무나 의아했던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주님은 그들에게 지금은 금식 할 때가 아니다. 혼인집에 신랑과 함께 있으니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는데 그때 금식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때’입니다. 금식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금식을 이용해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지만 주님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필요 즉 ‘때’에 맞지 않는 금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금식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이것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시기와 목적이 절적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됩니다. 좋은 것은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약도 적절하게 때와 방법에 맞게 먹아야 약이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독이 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금식하는 것을 옳은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주님은 금식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16-17절
금식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할 때가 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것을 전혀 인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밝았고, 역사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구약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물론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 수 없었으니까요.
주님은 그들에게 옷감과 포도주 비유를 통해 옛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옛 시대와 새 시대는 서로 연합할 수 없습니다.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18-26절 혈루증 여인, 관리의 딸을 살림
한 관리의 부탁
아직 예수님께서 금식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신 때 한 관리가 찾아와 부탁을 합니다.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지만 오셔서 딸에게 손을 대시면 곧 살아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관리의 말을 듣고 일어나 따라가십니다. 주님은 간절한 사연을 가진 이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아무리 피곤하고 바빠도 그곳으로 가십니다.
혈루증 앓은 여인
관리의 딸을 고치러 가던 중 혈루증 앓은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옷가를 만짐으로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혈루증은 몸에서 피가 나오는 병으로 매우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율법에서는 이러한 질병은 가진 이들을 부정하다 선언하고 멀리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왔으니 그 고통의 깊이가 얼마나 될까요? 그녀는 매일매일 죽어갔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주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간 것이죠. 혈루증 앓는 여인이 다른 사람을 만지며 부정하게 됩니다. 절대 만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며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녀는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낫게 한 것입니다.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은 돌이켜 여인을 보시고 ‘딸라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십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것을 ‘그 즉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구원은 단지 질병으로부터의 치유와 자유를 말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육신의 치유와 영혼의 구원이 함께 이루어진 진정한 ‘샬롬’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27-34절 두 맹인과 벙어리를 고치시다.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의 치유 기적은 계속 됩니다. 이번에는 두 맹인과 벙어리를 치유하십니다. 관리의 집을 나와 떠나실 때 두 맹인이 주님을 따라오며 자신들을 고쳐 달라 외칩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소리를 크게 지르며 주님께 간구합니다. 보이지 않으니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목소리를 이용해 주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님을 부를 때 ‘다윗의 자손’이라 표현합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이 표현은 당시로서는 대단힌 충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의 다른 말은 ‘메시아’이며, 유대의 왕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을 당시의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분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영적인 눈을 떠 있는 이들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마태복음 9장은 믿음이란 디딤돌이 계속 이어지며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그들의 믿음’, 22절에서 ‘네 믿음’ 다시 29절에서 ‘너희 믿음’이 사용됩니다. 믿음이 사용된 사건들은 모두 치유 사건이며, 자진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던 이들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보이게 됩니다. 믿음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예수님은 맹인들을 고치시고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지만 맹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립니다.(31절)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내 안에 기쁨이 가득하면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충만하면 복음이 내 입술과 삶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35-38절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다
두루 다니사
주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제발로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걷지 못한 이들에게 직접 찾아 가셨고, 말하지 못한 이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누군가 알아서 오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 되어야 합니다.
가르치시고
말씀을 풀어서 해석하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강론하는 것입니다.
전파하시고
전파는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남들에게 알려 주는 행위입니다.
고치시니라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장애를 치유하셨습니다.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이 정한 자들이 되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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