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강해

마태복음 7장 해설

7장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이자 6장에서 기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6장의 결론은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신다. 7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방식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이어가신다.

  • 1-6절 분별
  • 7-12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 13-23절 열매로 알리라
  • 24-27절 지혜로운 건축자
  • 28-29절 무리가 예수님의 권위에 놀람

마태복음 7장 강해

1-6절 무엇을 보는가?

비판하지 말라

6장 1절의 원문은 놀라울 정도로 짧다.

Μὴ κρίνετε, ἵνα μὴ κριθῆτε·

직역하면

하지마라 정죄를, 왜냐하면 비판 받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는 구절인가? 수많은 목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설교한다. 그런데 그 설교가 다른 사람은 비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비판하셨다. 그럼 예수님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설교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7장 1-5절까지의 핵심은 비판하다는 헤라어 크리노(κρίνω)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κρίνω는 마 5:40에서 ‘고발하다’로, 7:1,2에서 ‘비판하다’, 19:28 ‘심판하다’ 눅 7:43에서는 ‘네가 옳다’로 번역한다. 이 구절은 ‘네가 올바르게 판단했다’라고 직역하는 것이 훨씬 선명하다. 용례는 여기서 중단한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보아서 알듯이 이 구절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과 같은 분별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바른 분별을 하지 말라는 데 있다. 왜 그러는 것일까?

2절에서는 네가 하는 비판이 너를 비판할 것이고, 타인을 헤아리는 그 것으로 네가 헤아림을 받기 때문이라 말씀하신다. 3절에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와 네 속에 있는 들보를 비교함으로 비판의 본질을 통찰한다. 사람이 누군가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의 눈속의 티를 보려면 그에게 아무 가까이 가서 세밀하게 들여다 봐야 한다. 사실은 이것이 문제다.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음에도 말이다. 3절은 자신을 보지 못하면서 타인의 잘 보이지도 않는 티를 애써서 찾고 찾아 발견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비판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즉 남을 보려하지 말고 너를 보라.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보라. 주님도 비판하신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말한다. 그는 속이는 자다. 자신은 거룩한 척, 깨끗한 척 하지만 더러운 자고 부정한 자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에게 ‘비판하지 말라’라고 하신다.

자신을 보기는 힘들다. 아니 보지 못한다. ‘나는 나를 잘 알아’라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모르는 자다.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는 내부적 검열이 없다. 내로남불이다.

분별

6절을 분별하지 못한 자를 동등하게 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1-5절에서 말한 내용에 대한 반어법이다 외식하는 자는 남은 비판한다.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판은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비판(분별)도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자에게 주면 그것을 밟고 부수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모욕했다며 공격하게 된다.

  • 잠언 9장7절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 잠언 9장8절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7-12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7-12절까지의 핵심은 ‘약속’이다. ‘받을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니라’로 응답한다. 11절에서도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신다. 너무나 명백하게 응답이 있기에 수고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세 동사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세 동사는 연속적이고 과정이며, 하나이다. 구하는 것은 갈망이다. 이것은 자각이고 발견이고 깨달음이다. 깨달음 없이 시작할 수 없다. 자신이 부족하고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변화를 시도한다. 6절과 비교하라.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 자시니 누구인지 발견한 사람은 변화를 시도한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을 아는 자는 그것을 피할 방법을 찾게 된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찬처럼 말이다. 이것이 진정한 걱정이고, 바른 걱정이다. 세상에 대한 걱정이 아닌 영혼에 대한 걱정이다.

찾는 것은 행동이다. 생각과 마음에서 행동으로 실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서 멈춘다. 하지만 진정한 갈망자는 멈추지 않고 행동한다. 마지막 으로 그는 찾는다. 그리고 그 문 앞에서 문을 노크한다.

13-23절 열매로 알리라

이 부분은 마태복음 전체 핵심이기도 하다. 열매는 결과를 말하며 시작과 과정이 좋아 보이지만 결국 악을 행하는 자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반대로 선을 행하는 자들은 선한 열매를 맺게 된다. 과정도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과정은 과정일 뿐이다. 열매를 봐야 그를 안다. 승리는 결승점을 통과한 후에 결정된다.

좁은 문과 넓은 문

2천 년 전의 문화를 현대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비유도 그렇다. 우리는 좁은 문이 당시에 뭘 의미하는 지 알 수 없다. 넓은 문도 그렇다. 필자가 보기에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이 아는 좁은 문과 넒은 문이 있었을 것이다. 즉 이유는 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은유가 아니라 실제 비유일 가능성이 높을지 모른다.

결론은 나와있다. 넓은 문의 결과는 명망이다. 문은 크고 넓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 열매를 보자. 그 길의 끝은 명망이다. 하지만 좁은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지만 결국 ‘생명으로 인도’한다.

많은 사람이 찾는 집이 대부분 맞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대세인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는 다르다. 쉽고 편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일 확율이 매우 높다. 반면에 힘들고 어렵다면 그 길은 바른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악과 싸워야 하고, 옳지 못한 것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

15-23절까지는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된다. 여기서 주님은 영적 분별력을 기르는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그것은 열매다. 거짓 선지자는 남을 속여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득을 보려는 자이다. 그의 과정은 겸손하고, 수수하고, 정직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조작이다. 오직 결론을 위해 꾸민 덫이다. 순진한 척 양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의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다. 주님은 심는 대로 거둔다 하셨다. 이처럼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법이다. 열매는 곧 그 식물이다.

16절은 기묘한 비유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열매가 없다. 그런데 포도와 무화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배나무에서 포도가 열리는 것도 이상하지만,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에서 당시 가나안 7대 산물인 포도와 무화과가 열린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불에 던져질 나무들

19절은 은유적이지만 실제이다. 이사야서의 ‘포도원의 노래’에서는 언급되지만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열매가 들리지 않으면 땅을 버리기 빨리 나무를 완전히 자르고 뽑아서 제거해야 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다. 이러한 이야기는 누가복음 13장에도 등장한다. 이것은 특이한 비유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 누가복음 13장 7절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세례 요한 역시 열매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 마태복음 3장 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눅 3:9)

불법을 행하는 자들

21절에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23절에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를 언급하여 말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함을 강조하신다. ‘주여 주여 하는 자’는 경건하는 척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치 남들에게 보이려고 시장이나 성문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는 외식하는 자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행동이 없다. 실천 없는 믿음은 마귀적이다.

24-27절 지혜로운 건축자

지혜

설교를 마무리하신다. 지혜로운 자는 말을 듣고 행하는 자이다. 실천은 건축과 같다. 하지만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이다. 모래는 기반이 튼튼하지 않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모래가 흩어지고 사라진다. 기반이 약하니 집이 무너질 것이다.

예수님의 권고는 종말론적이다. 행한다는 것은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다. 행함은 연속적이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삶이 계속되는 한 실천도 계속된다.

28-28절 예수님의 권위에 놀라는 사람들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시자 사람들이 놀랜다. 지금까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기존의 서기관들과는 차원이 달았다. 여기서 ‘권위 있는 자’란 말은 매우 위험한 말이다. 감이 도달할 수 없는 권위로 말씀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놀람은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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