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강해

마태복음 6장 해설

산상수훈의 중심축은 6장의 주기도문이다. 산상수훈은 주기도문 전과 후로 나뉜다. 주기도문 전이 공적 교훈과 가까웠다면 주기도문 후로는 사적이며 친밀한 위로가 담겨 있다. 1-24절까지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선택해야하는 문제로 갈리고, 25-34절은 하나님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 1-4절 구제에 관하여
  • 5-15절 기도에 관하여
  • 16-18절 금식에 관하여
  • 19-24절 너의 보물은 어디에
  • 25-34절 먹고 사는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6장 강해

1-4절 구제에 관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6장 전반부의 핵심이다. 무엇인가를 행할 때 사람에게 보일 것이가 아니면 하나님께만 보일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상은 받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사람에게 상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께만 보이는 것은 하늘에 하나님께 상을 받는 것이다. 둘은 공존할 수 없다.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너희 의를

의를 행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가식된 행위다. ‘주의하라’는 προσέχω는 자신에게 ‘가져오다’ ‘생각을 깊이 하다’는 뜻이다. 즉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주의 깊게 고민하고 생각하라는 말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하지 말라’는 뜻이다. 너의 행위가 옳은지를 생각해 보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 προσέχω는 앞서다의 πρός와 붙잡다의 ἔχω의 합성어다. 직역하면 미리 붙잡다로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나팔을 불지 마라

구약에서 나팔을 불 때는 년초, 절기, 전쟁이 일어날 때이다. 즉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나팔을 불어 사람들에게 알린다. 부는 방법도 모두 다르다. 나팔을 부는 이유는 일종의 신호를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어떤 나팔소리는 성회로 모이라는 소리이고, 어떤 나팔 소리는 전쟁이 일어났으니 빨리 피라하라는 신호다. 결국 나팔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이 그 신호를 듣고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팔을 불지 말라’는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신호, 불어서는 안 되는 잘못된 나팔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다.

오른손과 왼손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게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인지는 뇌에서 한다. 손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이러한 표현한 것은 구제가 치밀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 마음을 빼앗긴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어떻게 하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까?’를 생각한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은 모든 것을 대표한다. 그러니 왼손이 모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모르도록 하라는 말은 그만큼 치밀하고 은밀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은밀함은 곧바로 이어지는 4절에서 분명히 등장한다. 2절의 나팔를 부는 것에 대한 대안이자 경고이다. 구제가 은밀해야 하는 이유는 구제를 당하는 이의 입장도 배려하라는 것도 포함한다.

5-15절 기도에 관하여

외식하는 자

기도의 문제로 넘어간다.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말라 하신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한다. 여기서 다시 ‘사람에게 보이려고’가 등장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자는 지금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흉내를 낸다. 이것이 외식이다. 그의 외식은 기도의 방식이 달라진다. 그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는 하나님께 해야 한다. 하나님께 보이려면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 골방은 지정학적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음의 문제이기에 골방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지만 틈 나는대로, 기회가 생기는 대로 골방에 들어가기를 힘쓴다.

많은 말

많은 말을 말을 적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쓸데 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하면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사랑하면 더 오래 많이 기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말은 실제의 많은 말이 아니다. 잘못된 말이다.

많은 말은 공적이다. 누군가는 공적을 쌓으면 기도에 응답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공적은 자신의 능력과 행위를 말한다. 그것으로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많은 말은 하나님을 설득하지 못한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도하라

모범이다. 문자적 의미로 ‘그대로 따라하라’가 아니다. 이러한 틀을 갖추고, 기도의 의미를 알고 기도하라는 말이다. 기도에는 모범이 필요하다. 모범은 배움이고, 습관이고, 틀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도를 무작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무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벗어난 적이 없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 안에서 서로 순종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

주기도문은 후에 따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다룬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직역하면 ‘ 아버지 우리 하늘에 계신’이다. 아버지로 번역된 헬라어 ‘파르테’는 가부장적 의미도 포함하지만 유대인이 갖는 맹목적이고 두려움의 존재인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리라는 것은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당시 기독교가 갖는 독특한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다.

‘우리’라는 표현 역시 공동체를 의미하지만 상당히 의미가 달라진다. 마태복음 안에서 ‘우리’는 유대 공동체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대로 순종하는 자들이다. 주님은 친히 자신을 찾으로 온 어머니와 가족에 대해 듣고 제자들에게 ‘누가 나의 어머니고 형제들이냐’ 물으셨다. 새로운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된다.

‘하늘’ 우라노스는 히브리어 ‘하샤마임’을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의 거처를 뜻한다.하늘은 하나님의 거처로 인간이 갈 수 없는 절대공간이다. 하나님은 질적으로 다른 분이심으로 말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구약에서 이름은 곧 존재였다. 신약도 마찬가지다. 이름이 없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정의 내릴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름은 정말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다만 다양한 호칭으로 불릴 뿐이다. 누군가는 ‘야훼’ ‘여호와’라고 말하는데 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엘, 엘룐, 엘샤다이 등등은 이름이 없기에 대용으로 부르는 것이다.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거룩하시고, 영원히 거룩하시다. ‘거룩’의 본 뜻은 구별 구분 되어 있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거룩’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존재, 또는 하나님의 전용이란 뜻이다. 즉 구별된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고, 거룩할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이 땅에서도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라’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먼저 써서 기분이 나쁘지만 그 번역이 옳다. 왕국은 왕이 통치하고, 왕의 말이 곧 법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것은 정의와 공의가 전제된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많은 목사들이 요즘은 굶는 사람들이 없다고 말한다. 참으로 어이없는 자이다. 지금도 한국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도 굶는다면 2000전에는 어땠을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매일 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저축 되지 않는다. 매일 계속해서 공급되어야 하는 공기와 같다.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순서의 문제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면 나도 그를 용서하겠다가 아니다. 나는 이미 용서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달라는 말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시험은 마귀다. ‘마귀에 빠지지 않게’가 더 정확하다. 즉 마귀에게 휘둘리고, 조종 받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천국 시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다시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연결된다.

15절은 주기도문의 결론이자 핵심이다. 용서하라는 말이다. 용서는 그냥 덮는 것이 아니다. 죄를 명백히 드러내고 그럼에도 너에게 복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조건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무능이고 죄와 타협하는 것이자 악에 대한 굴복이다.

16-18절 금식에 관하여

금식은 음식에 대한 단절이다. 하지만 더 명백히 말하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다. 구약의 소제와 같다. 앞선 주기도문의 거룩과 비교해 보자. 그런데 금식하면서 ‘외식’한다. 외식은 가면을 쓰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 겉으론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지만 속으로 철저히 자신의 탐욕을 챙기는 자다. 이것은 악이다.

금식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슬픈 기색’을 한다. 자신이 지금 거룩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 또한 나팔을 부는 것이다.

19-24절 너의 보물은 어디에

핵심은 20절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 어떻게 보물을 쌓을까? 그것은 보물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이다. 어떤 사람에게 보물은 돈(당시는 동전)이고, 보석이고, 주식이고, 권력이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보물은 하나님의 관점이고, 말씀이고, 영광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땅에서 자신의 소유를 나눈다. 섬기고 사랑한다. 주님은 부자 청년 관원에 소유를 팔아 천국을 사라 하셨다. 하지만 그는 근심하며 떠나갔다.

보물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보물인가를 묻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해석과 관점에 문제는 22절-23절에서 눈과 관련된다. 이 땅의 것이 보물이 이 땅에 쌓을 것이고, 하늘의 것이 보물이면 땅의 보물을 팔아 하늘의 것을 살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재물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25-34절 먹고 사는 것에 대하여

무엇이 중한가

보물의 문제에서 무엇이 중한가의 문제로 넘어간다. 소유에 대한 문제는 걱정과 근심으로 문제와 직결된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것에 대해, 목숨과 음식을, 몸과 의복을 비교한다. 걱정은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를 말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26절부터 32절까지는 25절의 해설과 같다. 중함의 문제는 걱정에 대한 것이며, 그 걱정이 왜 잘못되어 있는 가를 말한다. 먼저 공중의 새를 보라 하신다. 그 다음은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신다.(28절) 결론은 우리가 아무리 걱정해도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27절) 없다는 데 있다.

‘키’로 번역된 헬리키아(ἡλικία)는 키와 나이로 번역되지만, 적절한 시기나 성인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본문에세는 ‘자신이 원하는 적정한 때’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자신이 원하는 어느 시기를 말한다. 자신의 계획에 나는 언제까지 무엇을 하고, 언제 죽겠다는 그런 계획 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ἡλικία가 사용된 곳은 이곳 외에 눅 2:52, 12:15, 19:3, 요 9:21, 23, 엡 4:13, 히 11:11 등 모두 8번이다.

하늘 아버지가 기르시나니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하늘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30절에서는 하나님이 입히신다 말씀하신다. 모든 자연은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다. 그러나 사람이 애써 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모두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게으른 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과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부지런한 바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아신다.

6장의 큰 주제는 보물이나 걱정이 아니다. 기도다. 주기도문이 큰 축을 이루고 있고, 주기도문 앞에 바른 기도에 대해 알려 주시고, 주기도문 이후는 금식과 보물, 그리고 염려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핵심은 기도다. 모든 문제를 푸는 키는 ‘하나님이 보신다’ 또는 ‘하나님이 아신다’이다. 4절 보신다. 6절 보신다. 8절 아신다. 18절 보신다. 32절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하나님께서 보신다와 아신다는 하나님과 기도자와의 관계를 말한다.

먼저 구하라

6장의 핵심은 ‘아버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라고 하셨다. 나머지는 그 다음이다. 하늘의 계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면 다른 기도는 무의미해 진다. 왜냐하면 ‘이미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사정을 아신다. 그러니 숨길 필요도 없고 가식적으로 꾸밀 이유도 없다. 보물을 쌓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곧장 결론으로 나아간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말이 모호하게 드리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라나가라는 말이다. 먼저는 우선순위를 말하며, 삶의 방향을 말한다. ‘먼저’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가 아닌 삶의 우선순위를 잘 정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떤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이는 세상의 것을 세속적인 것이 절대 구할 필요가 없다 말한다. 아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하셨지 ‘구하지 말라’ 하지 않으셨다. 먼저는 삶의 방향성과 방식을 모두 담고 있다.

이제 기도에 대한 물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다. 그럼 7장으로 넘어가 실질적인 방법들을 배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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