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해설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5-7장까지의 내용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신자들과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산상수훈은 별명처럼 산 위에서 펼쳐진 예수님의 말씀이다. 산은 신성한 곳이며, 높은 자리라는 점에서 왕적 권위를 가진 곳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권위로 산 위에 올라 말씀한 것이다.
- 1-12절 팔복
- 13-16절 세상의 소금과 빛
- 17-20절 율법의 완성
- 21-26절 살인과 화목에 대해
- 27-32절 간음과 이혼
- 33-37절 맹세에 관한여
- 38-48절 원수와 복수에 대해
마태복음 5장 강해
1-12절 팔복
무리는 보시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라왔다. 제자들만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았다. 예수님은 항상 그들을 교육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셨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항상 가르치지는 않았다. 산상수훈은 무리 중에서 구별된 ‘제자들'(1절)에게 하신 말씀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무리에서 제자로 나아가야 한다. 군중 속에 있으면 안 된다.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하나님의 거하신 장소이다. 그들은 높은 곳은 신성하게 여겼다. 바알의 제단도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높은 곳은 신성한 곳이었다. ‘앉다’는 표현은 왕이 보좌에 앉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들은 들어야 한다.
입을 열어 가르치시니
입을 열면 지옥에서 올라온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말을 내 뱉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저주하고, 어떤 이들은 분노하고, 어떤 이들은 원망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입을 여시자 폭폭수와 같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복이 있나니
구약의 복을 헬라어로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구약의 복이 부유함, 건강, 장수 등과 관련이 있다면(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약의 복은 완전히 전복된다. 3-12절이 팔복인지 더 많은 복인지에 대한 논쟁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큰 맥락 속에서는 여덟가지의 복이 존재한다. 여기서도 팔복으로 보고 설명한다. 예수님이 정의하신 복은 새로운 것이다.
가난한 자는
마태는 ‘심령’을 덧 붙인다.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누가가 그냥 가난이라고 말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이다. 마태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가난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 시킨다. 가난은 저주의 실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난은 복이 된다.
천국이 저희 것이요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은 천국이다. 에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하늘 나라’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영적인 세계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난하지만 하늘에서 나라를 얻는다. ‘것이다’는 현재형을 사용하여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말과 통한다.
애통하는 자
애통은 잃음의 결과이다. 소유를 잃거나, 건강을 잃거나, 원수들에게 자녀를 잃을 때 애통한다. 애통은 현실에 대한 자각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한다. 왜냐하면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위로는 누군가가 편이 되어 준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빼앗아가고, 누군가는 편이 되어 준다. 누굴까?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안다. 죄에 대한 애통으로 서둘로 해석하지는 말자. 애통은 삶을 직시한 결과이다.
13-16절 세상의 소금과 빛
세상의 소금
세상에 있는 소금이다. 소금의 맛은 짠맛을 의미하다. 짠맛이 없는 소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금은 짠맛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소금이 짠맛을 잃게 된다면 존재의 이유가 없다.
소금은 세상에 있어야 한다. 세상에 없는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세상의 빛
두 번째는 빛이다. 빛도 ‘세상의 빛'(14절)이다. 세상에 있는 빛이다. 빛은 세상에 있어야 그 빛의 의미를 갖는다. 어둠이 아니라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빛은 진리의 삶을 의미한다. ‘너희 빛’은 너희의 행위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할 당연한 가치를 말한다. 16절 후반부에서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등불은 등경에 위에 둔다. 비추기 위해서는 말 아래 두지 않는 이유는 빛이 덮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이라는 표현은 그냥 큰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곡물을 담는 그릇이다. 나무로 되어 있어서 등불을 켜고 말로 덮으면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래서 등불은 등경 위에 두어야 빛을 발한다.
그리스도인은 존재와 소명을 따로 분리할 수 없다. 존재가 곧 소명이고, 소명이 곧 존재다. 촛불을 켬으로 의미를 갖듯,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빛을 발함으로 그의 의미를 갖는다.
17-20절 율법의 완성
일점 일획
‘완전하다’는 흠이 없다는 말로 율법적인 흠을 전제한다. 율법적 완전은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율법적으로 완전 즉 흠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흠이 없게 될까? 죽어야 한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흠이 없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자, 성취가 되신다. 천지는 변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변하지 않는다. 어떤 목사들은 ‘일점 일획’을 히브리어의 모음을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히브리어는 모음을 쓰지 않는다. 모음은 2세기 이후 랍비들이 발음을 보존하기 위해서 추가로 기록한 것이다.
일점 일획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작은 것도 모두 지키려는 것을 말한다. 19절에서 예수님은 곧바로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천국에서 큰 자는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21-26절 살인과 화목에 대해
‘옛 사람’이 처음 등장한다. 앞으로 계속 등장할 것이다. 여기서 옛 사람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살인하지 말라’와 ‘노하는 자’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자’ ‘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마음이 문제다. 즉 행동으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말과 생각으로 타인에 대해 악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살인죄에 해당 된다. 살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섭리에 대한 거부이자 항거이다. 하나님을 대신해 타인을 심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도 심판을 받을 것이 말한다.
그 다음은 제물을 드리다 화목해야 할 것을 언급한다. 앞선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화목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다.
27-32절 간음과 이혼
간음과 음욕
간음은 음욕의 결과이다. 구약은 아무리 마음이 음욕으로 가득차도 행위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주님은 인간의 타락한 심성까지 보고 계신다. ‘이미’는 종말론적 심판을 말한다. 음욕을 품지 않은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지체와 지옥
오른 눈에 실족하게 하면 빼어 버리라는 말은 모순이자 역설이다. 눈은 눈 자체가 아니다. 눈은 마음의 통로다.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한 것은 ‘이미’ 마음에 악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눈을 빼어 던져도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놀음에 미친 사람은 손가락을 잘라도 발가락으로 한다. 이것이 중독이고, 본성이다. 오른손 역시 마찬 가지다.
눈여겨 볼 것은 모두 ‘오른쪽’이다. 오른 눈과 오른 발이다. 이것은 신체 전부를 의미한다. 결국 모든 지체를 버리더라도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이혼증서와 간음
이혼증서는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고대 세계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큰 흠이었다. 하지만 남편들이 이혼증서를 써주면 여성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증명주는 증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혼증서를 써주며 이혼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실증이 나도 버리고, 귀찬아서 버리기도 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당시의 악행을 정죄한 것이다. 누구도 간음한 연고 없이는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반대로 간음했다면 버려도 된다. 그것이 남편이든 아내든.
33-37절 맹세에 관하여
헛 맹세
헛 맹세는 뻥이다.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는 거짓말이며 사기다. 고대 세계에선 따로 확증할 방법이 없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맹세를 지키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것이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더립힌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불신앙 때문이다. 그들은 금과 은으로 맹세를 하면 믿었다.
- 마 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하나님은 무형이며,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겉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불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차라리 돈을 걸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맹세는 타락했다.
맹세하지 말라
이제 예수님은 맹세를 금하신다. 헛된 맹세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지 말라 하신다. 심지어는 하늘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을도 하지 말라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맹세는 타락했고, 인간은 부패했다. 심지어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하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머리털 하나도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머리가 희어진다. 검게는 세월을 다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철저히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옳다 아니라
맹세 대신 있는 그대로 말하다.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라 하면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을 회복하라는 말이다. 네가 스스로 판단하고 네 안에서 해결하라는 말이다. ‘이에서 지나는 것’이란 자신의 본분, 주제에 넘는 행동을 말한다. 자신의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 하려는 것은 악이다. 맹세는 근본적으로 누군가 자신이 믿어주지 않을 외부의 어떤 것으로 자신을 대신하는 행위다. 이제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 너는 네 자신의 능력만큼 행동하라는 말이다.
38-48절 원수와 복수에 대해
눈은 눈으로
구약의 동해 보복법이다. 동해 보복법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복수이다. 정의이자 공의로운 행위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을 실명하며 상대편에게 한 쪽 눈만 빼앗지 않는다. 목숨까지도 빼앗을 수도 있다. 이것이 복수심이다. 동해보복법은 복수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정확히 복수하도록 하고, 가해자는 그에 응당한 질벌을 받게 함으로 복수심을 가라 앉히게 한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복수하지 말라는 말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악한 자는 원어적으로 사탄 마귀를 뜻한다. 아마도 마귀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것은 이어 나오는 말씀대과 어울리는 해석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정당한 징벌을 행해도 그들의 마음과 행위가 교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 편 빰을 치거든
이 부분을 불필요하게 과잉 해석하는 어리석은 목사들이 많다. 오른 편 빰을 때리기 위해서는 왼손으로 쳐야 한다는 둥, 어떤 사람은 오른손 손등으로 쳐야 한다는 둥의 괴이한 해석을 한다. 무엇이 옳은지 알 수는 없다.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오른쪽’이다. 뺨 즉 얼굴은 그 사람의 명예와 자존심을 말한다. 그 얼굴의 오른쪽은 전체를 뜻하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굳이 이상하게 해석할 이유가 없다.
왼 편도 돌려 대며
원수를 사랑하는 말과 동일하다. 무조건 당하라는 말이 아니다. 왼 편은 가치 없는 사소한 것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주었다면 굳이 사소한 것을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오리와 십리
오리는 당시 세계에서 누군가 부탁하면 예의 상 짐을 들어주는 거리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십 리는 오리의 두 배다. 그리스도인은 더 나아가 더 많은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리는 헨 밀리온(μίλιον ἕν)으로 1 밀리온이다. 십리는 2밀리온이다. 여기서 밀리온은 1448m이다.
이웃과 원수
이웃은 동족을, 원수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주변 나라였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웃을 동족으로 제한했다. 이웃 즉 동족에는 이자를 받으면 안 되지만 이방인에게는 받는다. 동족은 빚을 져서 잠깐 종으로 삼을 수 있지만 희년이 되면 풀어 줘야 한다. 하지만 이방인은 원히 종으로 삼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동족은 이웃으로 여긴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율법사가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것이다. 주님은 이웃을 동족에서 이방인까지 확장 시킨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여기서 원수는 명확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다. 하지만 1세기 정서상 원수는 로마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말씀하신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근거를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으로 삼는다. 세리와 형제 문안도 이와 같다. 이제는 구약의 틀을 깨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상으로 삼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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