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강해

마태복음 4장 해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사역을 사작하신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 40일을 금식한 다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40일은 상징적인 숫자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뜻한다.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40년을 보냈다면, 예수님은 순종으로 승리하신다.

  • 1-11절 광야의 시험
  • 12-17절 요한의 잡힘과 사역의 시작
  • 18-22절 제자들을 부름
  • 23-25절 공생애의 사역

마태복음 4장 강해

1-11절 광야의 시험

성령에 이끌리어

놀라운 표현이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성령에 충만했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자신의 뜻과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따라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 삼위일체는 존재의 본질과 의지, 목적이 항상 동일하시다.

성령이 우리를 이끄실 때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이 성령의 인도하시과 다를 우리는 성령을 따르기 보다 자신의 뜻을 따른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오류가 있다. 당장에는 모든 것이 맞고 합당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광야의 시험은 그 자체로는 의미를 찾기 힘들지만, 구속사적 맥락에서 광야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후 40년의 세월을 이야기하며,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통해 순종의 시대로 체인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새로운 모세가 이끄는 예수님은 반드시 승리하실 것이다. 성령의 인도가 지금은 모호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순종해야 한다.

시험하는 자

마귀는 항상 시험했다. 아담과 하와를 시험한 뱀은 아담과 하와를 속였고, 이겼다. 이번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을 찾아왔고 시험한다. 시대는 변하고 세월은 흐르나 인간도 변하지 않고 마귀도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길 수 있을까?

마귀의 시험은 단어가 의미하는 테스트가 아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다. 넘어뜨리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은 ‘유혹’으로 바꾸어야 더 옳다. 마귀는 유혹하는 자다. 절대 속으면 안 된다.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위대해도, 목적은 당신을 넘어뜨리는 것이다. 절대 잊지 말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질문은 세 번의 시험 모두에 사용된다. 마귀가 예수님을 모를 까? 잘 안다. 사람보다 귀신들이 더 잘 알고, 마귀는 더더욱 잘 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막 3:11, 눅 4:41)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다. 속이려는 것이고, 넘어뜨리는 목적이다.

인간은 스스로 공의롭다 생각한다. 누군가를 모욕하는 견디지 못한다. 그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명예욕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마귀는 인간 내면의 원초적 본능을 공격한다. 누군가 나를 공격할 때,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느낀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참으라는 말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견디고, 이겨 내라는 말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늘이라면 말이다. 그럴 능력이 있느냐며 조롱한다. 마귀의 도전은 거짓말로 예수님을 조롱한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넌 절대 이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없다’ 조롱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떡’에 관심을 가졌는가. 정치인들은 늘 떡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단언한다. 떡을 잘 해결하면 그는 위대한 정치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떡의 문제 만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그 중요한 것이 있다. 그렇다고 신자들은 떡이 필요 없다. 이슬만 먹어도 된다는 말을 하는 자들은 모두가 거짓말쟁이 사기꾼 이단 사이비들이다. 반드시 그런 사람들을 따르지 마라. 예수님은 배고픈 자들에게 밥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 아픈 자들은 치료해 주셨다.

그럼에도 확실히 사람은 떡만으로는 살 수 없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래서 나이갈 들수록 명예를 추구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는 것도 연관이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바로 믿음의 문제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영적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기록되었으되

예수님이 말씀으로 물리치자 마귀는 곧바로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공격한다. 마귀는 시편 91:11,12 말씀으로 예수님을 시험한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잘못된 인용이다. 하나님은 아무나 보호자 않으시다. 하지만 마귀는 교묘하게 말씀을 가져와 왜곡 시킨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 시켜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는 아니다. 들으면 성경에 있는 내용이고,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마귀는 왜곡 시키고, 오해하게 만든다. 잘못된 해석은 악으로 인도한다. 이단들이 성경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이비가 기존 교회와 많이 다른가? 아니다. 거의 동일하다. 마귀도 때로는 자신을 천사로 가장한다는 것을 잊으면 절대 안 된다.

사탄아 물러가라

마지막 시험은 높은 곳에 올라가 자신을 경배하게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주겠다 속인다. 속지 말라. 이 세상은 마귀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마귀는 단 하나도 자신의 것이 없다. 자신이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 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 단에 단호하라. 의논하지 말고 속지 말라. 물리쳐야 한다.

12-17절 요한의 잡힘과 사역의 시작

들으시고

이 부분은 상당히 모호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곧바로 자신의 사역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한 동안 세례 요한을 따라 다녔을 가능성이 높거나, 사역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헤롯이 빌립의 처를 빼앗은 것을 두고 비판했다. 헤롯은 분을 참지 못하고 그를 옥게 가둔다. 이 일로 세례 요한의 사역은 급하게 마무리 된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셨을까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설명은 지금까지의 사역이 전화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세례 요한의 때가 지나고 예수님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나사렛을 떠나

나사렛은 어머니 마리아가 살던 곳으로 예수님의 고향이다. 하지만 이제 집을 떠나 갈릴리의 번화가인 가버나움으로 이동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를 중심을로 펼쳐 진다. 성경은 이사야 9:1-2절을 인용하여 이방에 빛이 비추었음을 말한다. 갈릴리 주변을 중심은 잇사갈, 므낫세, 납달리가 주변으로 둘러싸이고, 스블론과 갓이 연관되어 있다. 사실은 지도는 선을 긋지만 엄밀하게는 서로 이동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갈릴리는 스블론, 납달리, 므낫세 반지파, 잇사갈 지파라 함께 모여 사는 곳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분배 지도

갈릴리 지방은 원래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후에 북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하면서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게 된다. 앗수르의 혼합주의는 결국 북왕국이 더 이상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혼열족으로 전락한다. 신약 시대에 이방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닌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개취급을 받는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버려진 땅,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곳에 사역을 시작함으로 이방의 빛이 되었다 말한다.

18-22절 제자들을 부름

보시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관찰하다’ ‘주목하다’는 뜻이다. ‘보다’의 ‘호라오(ὁράω)’는 마 1:20에서 ‘보라’ 로 번역되었다. 2:1에서 동방박사들이 ‘보았다’는 그 별을 설명할 때 쓴 단어다. 우리는 제자들의 부름은 그냥 지나가다 툭 치며 ‘와라’라고 말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상당히 긴 시간을 주목하고 관찰하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영어는 종종 이 단어를 보다와 함께 ‘경험하다(experience)’로 번역하기도 한다.

나를 따라 오너라

제자가 되는 길은 주님을 따라 가야 한다. 따라가지 않고 제자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함께 말하고, 함께 눕고, 함께 해야 한다.

되게 하리라

제자는 교육 되고, 훈련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예수님께서 만드신다. 수동형이다. 사람의 능력과 경험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주님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드신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아버지를 버려두고

기독교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 정말 일까?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구절이다. 하지만 1세기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를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아야 한다. 제자가 되려면 선생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기독교는 신앙이 다르다면 절연한다.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 아버지를 버리지 못하면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아니다. 하지만 불효를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23-25절 공생애의 사역

두루 다니사

예수님은 집에 머물면서 사람들이 찾아 오도록 하지 않으셨다. 직접 찾아 가셨다. 제자들을 만나 부르시고, 병자들을 찾아 치유하셨다. 교회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직접 찾아가야 한다.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시고

23-25절은 단순한 사건의 해설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세 가지 사역을 하신다. 하나는 가르치심, 두 번째는 전파(선포), 세 번째는 치유다. 세 가지는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을 짚어 주며, 회복이라는 원목적을 이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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