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장 강해

마태복음 3장 해설

누가복음에는 잠깐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린 생애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마태복음 역시 기록이 없다. 3장이 시작되면 곧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소개된다. 먼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이로서 공식적으로 공생애 사역이 시작된다.

1세기 당시 세례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의미를 가진다. 다마스커스 문서 등에 의하면 침례는 한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한 엄격한 절차였다. 세례를 받기전 엄격한 자격 시험이 있고,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 요한의 제자 또는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의 세례와는 상당히 다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다.

  • 1-12절 세례 요한의 사역
  • 13-17절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3장 강해

1-12절 세례 요한의 사역

그 때에

일반적인 용어다. 마태는 이 용어를 세례의 요한의 사역의 시작에 사용한다.

유대 광야에서

유대광야(미드바르 예후다 מִדְבַּר יְהוּדָה)는 가나안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광야다. 사해 서편에 존재한다. 윗편에 여리고가 있고, 아래오는 페트라 지역으로 가는 지역이다. 협곡이 많고, 풀고 거의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곳이다. 이러한 광야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서쪽으로는 유대산맥이 있고, 동쪽으로는 사해가 존재한다. 사해는 지중해보다 낮다. 산맥과 해저층 중간인 탓인 급격한 협곡들이 굉장히 많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 [유대 광야]를 참고 바람.

유대 광야의 모습. 협곡이 있다.

회개하라

직역하면 ‘돌아서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감정적 돌아섬을 포함하지만 더 정확한 것은 삶과 행동을 돌이키라는 말이다. 구약에서는 ‘회개하라’가 아닌 ‘돌아서라’ 또는 ‘돌이키라’로 사용된다. 우상을 섬기는 삶에서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이다.

이사야 예언

인용된 곳은 이사야 40:3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 구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회복하실 것을 예언한다. 이사야 40:4은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평탄한 길로 회복될 것을 선언하다. 세례 요한 길을 예비하는 자다. 예수님의 오시기 전, 길을 평탄하게하고 편하게 오도록 준비하는 자이다.

교만한(높은) 마음은 낮아지고, 낮은(비하) 마음은 높여 평탄하게 하신다. 모든 것의 기준은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높아진 마음과 낮아진 마음이 고르게 된다. 왜곡된 것들을 바로 잡힌다.

요한의 생활

요한은 낙타털 옷과 허리의 가죽 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다. 모두가 자연에서 얻은 것이다. 즉 원시작 생활을 말한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로마 문명권은 굉장히 고도화된 문명이었고, 높은 생활을 유지했다. 선지자는 광야에 있다. 마태복음 11:7-10을 보자. 이곳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왜 광야에 있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선지자는 광야에 있어야 한다. 그는 거칠고 힘든 삶 가운데서 그곳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가실 길을 준비해야 한다. 광야는 단지 고생, 힘듦을 말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삶을 말한다. 자유는 방탕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이익에 야합해야 하는 불가피한 종속의 삶으로부터의 자유다.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자유는 독립적이며, 철저히 하나님께 대해서는 종속적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독사는 독을 품고 있다. 독사의 자식들은 그들 역시 독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종종 사람들은 길을 갈다 독사에 물려 죽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과 권력자들이다. 바리새인들은 소위 평신도 신학자들이자 개혁파들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두개인들은 거만했고, 바리새파들은 교만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이스라엘에서 ‘열매’는 삶을 의미했다. 문맥상에서도 분명하다. 삶은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거짓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에게는 열매가 없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열매 없는 포도나무는 뽑혀 버려질 것이다.

회개하게 위하여

회개는 삶이다. 세례는 삶의 변화를 요구했다. 세례를 받음으로 엄격한 규율 공동체 들어갔다. 즉 회개는 세례를 통해 확증되었다.

성령과 불로

물은 씻는다. 죽음과 탄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은? 태운다. 오순절 사건 때 성령이 불의 혀처럼 보인 것은 성령과 불이 동일한 상징인 것을 말한다. 물과 불은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 물이 있고, 불이 있다.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씻음과 죽음 이후 성령으로 소멸된다. 불은 완전한 소멸(신 4:24, 히 12:29를 보라)이다. 결국 물과 불은 하나다.

민수기 31:23에 의하면 불은 정결하게 한다. 불을 지나 견디면 정결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며 태워져 버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심판자요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다.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는 견딜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당한 것이다. 마치 시편 1편의 의인과 악인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견디는 자는 의인의 총회에 들어갈 것이다.

13-17절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세례는 스승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요한을 스승으로 받는다. 요한이 깜짝 놀라 거절한다. 요한의 거절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해야 ‘모든 의’를 이룬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람 아래 있음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구속사적 의미에서 사람인 것을 드러낸 것이며, 이후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을 당할 것임을 예표 한다.

하늘이 열리고

닫혀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과 하나님이 계시는 시공의 질적 차이를 말한다. 마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듯. 하늘이 찢어짐으로 열린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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