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장 주해와 강해

깊은 데로 나아가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

누가복음 5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죄를 사하시고, 새 삶으로 이끄시는 장입니다. 밤새 수고했으나 빈 배를 끌고 돌아온 어부들에게 예수께서는 깊은 데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병 환자에게는 손을 내미시고, 중풍병자에게는 죄 사함을 선언하시며, 세리 레위에게는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장면을 묶는 중심 명제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실패와 부정함과 죄의 자리로 찾아오셔서, 자신의 말씀과 권세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새 삶으로 부르시는 구주이십니다.

빈 배를 은혜의 그물로 바꾸시는 부르심(눅 5:1-11)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실 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듭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의 사역은 기적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무리 가운데서 시작됩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적과 가르치시는 말씀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기적은 말씀을 대신하는 구경거리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 누구의 말씀인지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호숫가에는 배 두 척이 있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 하루의 일을 마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밤은 물고기를 잡기에 더 적합한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밤새 수고하고도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물을 씻는 일은 다시 출항할 준비가 아니라 실패한 노동을 정리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들의 빈 배 곁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장 성공적이고 준비된 순간에만 찾아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가 애써도 손에 남은 것이 없다고 느끼는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배에 앉아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당시에는 앉아서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자세였습니다. 물가의 배는 자연스러운 설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시몬은 아직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으로 소개되지 않지만, 자기 배를 내어 드립니다. 그의 작은 순종은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크지 않더라도, 주님께 내어 드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깊은 데”는 단지 물리적으로 깊은 호수만을 의미하지만, 이 말씀은 시몬에게 자신의 경험과 계산을 넘어 말씀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시몬은 어부입니다. 밤새 물 위에서 일했고, 물고기잡이의 시간과 장소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배 위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분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의 입장에서는 낮에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시몬은 “선생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헬라어 에피스타테스(ἐπιστάτης)로, 누가복음에서 예수를 향해 사용되는 존칭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몬은 예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실패와 경험을 숨기지 않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라는 고백에는 피곤과 허탈함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실패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사실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고백은 신앙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시몬은 물고기가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예측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결과가 보장될 때만 순종하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결과를 먼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분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모든 상황을 이해한 뒤에 시작되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행동입니다.

그물을 내리자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됩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돕게 하고, 두 배에 채우니 잠길 만큼 되었습니다. 이 풍성한 고기잡이는 예수께서 자연 세계 위에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적의 중심은 단지 풍요한 물질의 축복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성공한 어부로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풍성함을 통해 시몬의 눈을 열어, 예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보게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때 누가는 그를 “시몬 베드로”라고 부릅니다. 시몬은 엄청난 고기잡이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기 죄를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만나는 사람은 자기 능력과 공로를 자랑하기보다,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베드로도 예수의 권세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압니다.

“떠나소서”라는 말은 예수를 싫어해서 내뱉은 거절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분 가까이에 죄인이 설 수 없다는 두려움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반대로 죄를 깨달을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을 향해 “멀리 떠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의 부정함 때문에 물러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가까이 부르시는 구주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생긴 두려움에 대한 복음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취하다”는 헬라어 조그레오(ζωγρέω)로, 살아 있는 채로 사로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은 물고기의 죽음과 연결되지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사람을 취하는 일은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사명입니다. 복음 전도는 사람을 교회의 숫자로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라,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리스도 안의 생명으로 이끄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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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와 요한도 이 일에 놀랍니다. 그들은 시몬의 동업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종교적 경험만을 다루지 않으시고, 공동체를 함께 부르십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릅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라는 말씀은 모든 제자가 반드시 동일한 형태로 직업과 재산을 떠나야 한다는 획일적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르심이 삶의 주변부에 머물 수 없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그분을 내 계획의 한 부분으로 더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과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빈 배의 실패 속에서 예수를 만났고, 풍성한 고기잡이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보았으며, 마침내 사람을 살리는 사명으로 부름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끝으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단지 세상적 성공으로 뒤집는 데 만족하지도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그물이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르느냐입니다.

부정함과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인자(눅 5:12-26)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찾아옵니다. 성경에서 “나병”으로 번역되는 말은 오늘날 특정 질병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하기보다, 당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었던 여러 피부 질환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신중합니다. 본문은 그가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상태가 심각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공동체와 예배의 자리에서 분리될 수 있는 아픔을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간구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고백에는 믿음과 간구가 함께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 능력이 없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뜻을 자기 욕망으로 조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원하시면”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분명히 아뢰면서도, 하나님이 선하시며 지혜로우신 분임을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아래에서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일은 부정함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정한 것이 깨끗한 사람에게 옮겨가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를 만지심으로 부정해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방향입니다. 죄와 부정함에 사로잡힌 인간이 자기 힘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깨끗하게 하다”는 헬라어 카타리조(καθαρίζω)입니다. 이는 단순히 병이 낫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의 치유는 육체의 회복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구원의 표지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깨뜨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회복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납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지체 없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모세가 명한 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정결함의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레위기 14장의 규정과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는 혁명가가 아니라, 율법의 참된 목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는 일은 그 사람이 실제로 정결하게 되어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음을 확인하는 절차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들에게 증거가 됩니다. 예수의 사역은 율법을 폐기하는 무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긍휼을 성취하는 사역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침을 받기 위하여 더욱 많이 모입니다. 예수의 명성은 퍼지지만,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에 물러가 기도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찾을수록 그분은 아버지와의 교제 가운데 자신을 두십니다. 예수의 사역은 군중의 열광이나 인간적 성취감에 의해 이끌리지 않습니다. 교회 역시 사람의 요구와 성과에 쫓기기 전에,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사역이 끝난 뒤에 덧붙이는 경건한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감당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갈릴리와 유대 각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는 이 장면에서 처음부터 단순한 악인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백성의 신앙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를 즉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 지식이 때로는 겸손한 믿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은혜를 거부하는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주의 능력이 예수를 더불어 병을 고치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이어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두려 하지만, 무리 때문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팔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의 고통도 컸겠지만, 그를 메고 온 이들의 사랑과 간절함도 깊었습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와 사이로 병든 사람을 침상째 예수 앞에 달아 내립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집은 평평한 지붕과 바깥 계단이 있는 경우가 있었기에 이러한 접근이 가능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의 관심은 건축 구조보다, 예수께로 나아가려는 믿음의 간절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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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여기에는 중풍병자 자신의 믿음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이 함께 포함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단지 마음속에 숨겨진 감정이 아니라, 예수께 나아가게 하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우리는 타인의 믿음으로 대신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지친 사람을 예수께 데려가는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진 사람, 기도할 힘조차 없는 사람, 고통 때문에 주님께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죄하지 말고 함께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병 고침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먼저 죄 사함을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그 병이 반드시 그의 개인적 죄 때문에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고난을 특정 죄의 직접적인 형벌로 연결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병의 원인을 추궁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더 깊은 문제인 죄를 다루십니다. 인간은 육체적 회복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중요한 신학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죄를 사하실 최종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께서 누구신지 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판단하지만, 예수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죄를 사하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말만 한다면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은 눈으로 즉시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죄 사함의 권세를 보이는 치유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인자”는 헬라어 휘오스 투 안트로푸(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곧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자주 사용하신 칭호입니다. 이는 단지 예수의 인간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니엘 7장에 나타나는 하늘 구름을 타고 오며 영원한 권세를 받는 인자의 소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낮은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죄를 사하시고 심판하실 하나님의 권세를 지니신 인자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곧 일어나 그들이 보는 앞에서 침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하나임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죄 사함을 선언할 권세가 있으시고, 그 선언은 실제 회복을 가져옵니다.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일”은 헬라어 파라독사(παράδοξα)와 연결되어, 기대를 넘어선 놀라운 일을 뜻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상식을 부수는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죄인이 용서받고 무너진 삶이 일어서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현실입니다.

죄인을 새 언약의 기쁨으로 부르시는 신랑(눅 5:27-39)

그 후 예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라는 세리를 보십니다. 세리는 로마의 조세 체계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동족에게 미움을 받기 쉬웠습니다. 일부 세리는 정해진 세금 외에 더 거두어 이익을 취하기도 했고, 그로 인해 세리라는 이름은 죄인과 함께 언급되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세리의 개인적 삶을 동일하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레위가 사회적으로 신뢰받기 어려운 직업의 자리에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짧은 명령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자신의 제자로 부르시는 은혜의 명령입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릅니다. 그가 실제로 모든 재산을 즉시 처분했다는 뜻으로 본문을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지만, 세관에 앉아 있던 삶의 방향을 떠나 예수께 속한 제자의 길로 옮겨 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과거의 죄와 불의한 방식을 그대로 붙든 채 예수를 삶의 장식으로 추가하는 일이 아닙니다.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를 위하여 큰 잔치를 엽니다. 많은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앉아 있습니다. 레위는 예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은 뒤, 그 기쁨을 혼자 간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사람들을 예수께 초대합니다. 참된 회심은 과거의 관계를 모두 끊고 고립되는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롭게 받은 은혜를 통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이들이 예수를 만날 기회를 열어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죄의 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분별해야 하지만, 복음은 죄인을 향해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식탁입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비난합니다.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교제와 수용의 표지였습니다. 그들의 문제의식에는 거룩함을 지키려는 염려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죄의 삶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자체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함을 죄인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분리로만 이해했고, 죄인을 회복시키러 오신 예수의 긍휼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라고 답하십니다. 예수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죄를 병보다 더 깊은 인간의 문제로 보십니다. 의사가 병자를 찾는 것은 병을 인정하고 방치하는 일이 아니라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에게 가까이하신 것은 그들의 죄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회개와 생명으로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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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는 말씀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실제로 죄 없는 의인들이 따로 있고 그들은 구원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의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반어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를 부르십니다. 복음은 죄인이기 때문에 배제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들려야 하는 소식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고 말합니다. 금식은 구약과 유대교 전통에서 슬픔과 회개, 간구와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표현하는 중요한 경건의 행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금식 자체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자신의 임재가 어떤 시대를 열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으로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때때로 언약 백성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구원의 기쁨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메시아가 오신 때는 단지 슬픔과 결핍만을 표현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방탕의 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구원의 기쁨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장차 예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리실 일을 내다봅니다. 제자도의 길에는 기쁨만 있고 슬픔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금식할 수 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은혜를 얻어 내기 위한 공로가 아니라, 우리 안의 욕망을 내려놓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더욱 갈망하는 믿음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은 새 옷도 버리고 낡은 옷에도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부대”는 가죽으로 만든 포도주 저장 용기입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하면서 팽창하기 때문에 낡아 굳어진 가죽 부대에 넣으면 터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새로운 것이 언제나 좋고 오래된 것은 모두 나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는,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지키는 낡은 종교적 틀 안에 가둘 수 없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가리켰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폐기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신 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낡았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그 계시를 은혜 없는 규칙과 자기 자랑의 체계로 바꾸어 버린 데 있습니다. 새 포도주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가져오신 새 언약의 은혜는 회개하고 믿는 새 마음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익숙한 것을 쉽게 놓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어떤 이들은 오래된 것이기에 더 좋다고 여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새 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묵은 것”은 구약성경이나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자기 의와 전통의 방패로 만들어, 그 말씀의 성취이신 예수를 거절하는 마음을 경고합니다.

우리도 익숙한 신앙의 형식이 복음 자체를 가리게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해 온 예배 방식, 교회 안에서의 경험, 자신이 지켜 온 생활 규범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한다면 복된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은혜를 거절하는 근거가 된다면 낡은 가죽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시고, 그 죄인을 회개시켜 새 삶을 살게 하시는 신랑이십니다. 그분의 복음은 우리의 외형만 고치는 패치가 아니라, 마음과 삶의 방향을 새롭게 하는 새 포도주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5장은 예수께서 누구를 부르시고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빈 배를 바라보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말씀을 신뢰하도록 부르셨고, 나병 환자의 부정함 속으로 손을 내미셔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죄 사함의 권세를 나타내셨으며, 세리 레위에게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건강한 척하는 사람의 자랑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자신이 병들고 죄인임을 아는 사람을 회개로 부르러 오신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낙심만 하지 말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죄와 수치 때문에 주님에게서 멀어지려 하지 말고, 우리를 만져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 삶의 식탁과 관계 속에서 예수를 드러내며, 새 포도주이신 복음에 합당한 새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죄인을 부르시고 생명의 사명으로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믿음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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