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순종에서 가난한 자의 복음으로
누가복음 4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메시아이신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나사렛 회당에서는 이사야의 약속이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그 은혜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를 거절합니다. 이어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나타내십니다. 이 모든 장면을 관통하는 중심 명제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를 구원하시되 인간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시는 참된 하나님의 아들(눅 4:1-13)
누가복음 3장의 마지막에서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선언을 들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은 바로 그 선언 뒤에 광야의 시험을 배치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영광스러운 칭호로만 확인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아들의 길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드러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능력을 위해 아들 되심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순종하는 길로 그 정체성을 증명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신 뒤,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십니다. “이끌리다”는 헬라어 아고(ἄγω)와 연결되는 말로, 예수께서 우연히 광야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아래 그곳으로 가셨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예수를 죄로 유혹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여 죄를 짓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를 시험의 자리로 이끄셨고, 마귀는 그 자리에서 예수를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마귀의 악한 의도는 같지 않지만, 하나님은 악한 시험마저 자신의 구원 목적 안에서 사용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사십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 모세와 엘리야의 금식 기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평하며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를 감당하시고, 참된 언약 백성으로 순종하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의 족보가 예수를 아담에게까지 연결한 뒤 곧바로 광야 시험을 기록하는 것은, 첫 아담의 실패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비하게 합니다. 아담은 풍성한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지만, 예수께서는 굶주린 광야에서 말씀을 붙드십니다.
마귀는 예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시험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제안이 아닙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은,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지 말고 네 능력으로 너 자신을 증명하라는 유혹입니다. 예수께서 돌을 떡으로 바꾸실 능력이 없으셔서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아버지의 뜻과 무관하게 자신의 필요와 명예를 위해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8장의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사건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굶주리게 하시고 만나를 먹이심으로써, 사람이 떡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체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떡은 실제로 필요하고, 굶주림은 실제 고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떡을 절대화할 때 지켜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떡을 얻는다면, 그 떡은 생명이 아니라 우상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시험이 찾아옵니다. 생계와 건강, 성공과 안전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자리에 놓일 때 우리는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 앞에 서게 됩니다. 신앙은 현실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필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정직하지 못한 방법과 불의한 타협으로 자신의 삶을 지키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붙드심으로 참된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마귀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 천하 만국을 보이며, 자기에게 절하면 그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마귀는 그 권세가 자기에게 넘겨진 것이며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준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악한 구조와 권세가 실제로 사람을 억압하고 미혹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말은 언제나 거짓과 과장이 섞인 말입니다. 모든 권세의 궁극적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마귀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허락과 제한 아래 있을 뿐입니다.
이 시험은 십자가 없는 왕권의 유혹입니다. 예수께서는 만국의 왕으로 오셨지만, 마귀는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건너지 않고 영광을 얻으라고 속삭입니다. 세상의 권세를 얻기 위해 한 번만 절하면 된다는 제안은 너무 효율적이고 빠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마귀에게 절하시는 순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왕은 세상의 어둠에 굴복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권은 타협과 숭배의 거래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 왕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신명기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배하다”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로, 몸을 굽혀 절하며 최고의 충성을 드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예배하지 않는 중립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돈과 권력, 인정과 쾌락, 민족과 이념, 자기 자신 가운데 어느 하나를 궁극적인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마귀의 시험은 우리에게도 늘 같은 모양으로 다가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 신앙의 양심을 한 번쯤 접어도 된다는 생각, 결과가 좋다면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실은 세상의 권세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세상의 우상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만 섬기는 순종으로, 우리가 어떤 왕 아래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마귀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다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시편 91편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사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말씀을 모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을 잘라 내고 왜곡하여 자기 목적에 이용합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에게 주시는 보호의 약속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며 위험을 만들어 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닙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교만입니다. 예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신다면 많은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손쉽게 대중의 관심과 종교적 열광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적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거나, 하나님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하나님께 위험한 일을 강요하고 그 결과로 나를 증명하게 만드는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 6장의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맛사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며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라고 하나님을 시험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도, 자기 요구가 즉시 충족되지 않자 하나님의 임재와 신실하심을 의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시험할 필요가 없는 아들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세 번의 시험에서 모두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어려운 순간에 성경 구절을 몇 개 암송하면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방법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승리는 말씀을 마술처럼 사용한 기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신 데서 나옵니다. 말씀은 우리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 아래 복종시키는 진리입니다.
마귀는 모든 시험을 마친 후 얼마 동안 예수를 떠납니다. “얼마 동안”이라는 표현은 싸움이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귀는 더욱 적당한 때를 기다립니다. 누가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십자가를 앞두실 때, 어둠의 권세는 다시 움직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시작된 예수의 순종은 겟세마네와 십자가까지 이어집니다. 첫 아담이 불순종으로 죽음을 가져왔다면, 예수께서는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여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시험을 완벽히 이겨 낸 공로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의에 달려 있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되 거절당하시는 메시아(눅 4:14-30)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십니다. 시험을 이기신 뒤의 사역은 인간적 자신감이나 세상의 전략에서 시작되지 않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시작됩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지고, 그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누가는 곧 예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으로 가셨을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처음의 칭송은 곧 거절과 분노로 바뀝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분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공예배와 말씀 읽기의 자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회당 예배에는 율법과 예언서의 낭독과 해석, 기도와 권면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글을 받아 펴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읽으십니다. 이어 포로 된 자에게 자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함,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읽으십니다.
이 본문은 주로 이사야 61장 1절과 2절 앞부분을 바탕으로 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한다는 표현은 이사야 58장의 언어와도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는 두루마리를 말아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십니다. 당시 앉는 자세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자세였습니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주목할 때, 예수께서는 짧지만 결정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응하다”는 헬라어 플레로오(πληρόω)에서 나온 표현으로, 채워지고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완료된 상태를 강조하는 형태로 사용되어,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예수 안에서 성취되어 그 효력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사야가 멀리 바라본 구원의 날이 이제 “오늘” 임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오늘”은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의 탄생 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했고, 훗날 삭개오에게도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며, 십자가 위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언젠가 일어날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가난한 자”를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만 제한할 수도 없고, 반대로 영적인 의미로만 바꾸어 실제 가난한 이들을 지워 버릴 수도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 경제적·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세상의 자원과 자기 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인간의 실상을 드러냅니다. 예수께서는 가난을 하나의 낭만적 미덕으로 선포하지 않으십니다. 가난과 억압, 포로 됨과 눈멂, 짓눌림은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의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현실 속에 복음을 들고 들어오십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에서 자유는 헬라어 아페시스(ἄφεσις)로, 누가복음 3장에서 죄 사함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자유는 정치적 억압에서의 해방을 포함할 수 있으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의 죄책과 권세, 사탄의 속박, 죽음의 공포 아래 있는 인간을 풀어 주시는 자유입니다.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되는 일도 예수께서 실제로 행하실 치유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어둠에 갇힌 인간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시는 영적 빛을 드러냅니다. 복음은 영혼만 다루고 몸의 고통을 외면하는 메시지가 아니며, 반대로 사회적 문제만 해결하고 죄의 문제를 말하지 않는 메시지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존재 전체를 향합니다.
예수께서는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희년의 배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 25장에서 희년은 빚과 종살이, 토지의 상실로 무너진 삶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질서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희년이 실제로 어느 정도 충실히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그 제도가 지닌 신학적 의미는 분명합니다. 땅과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끝없이 착취할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며 죄로 무너진 삶을 회복하시는 참된 해방을 가져오십니다.
예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실 때, 본문 뒤에 이어지는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라는 구절을 여기서는 읽지 않으셨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한 심판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은혜의 해가 도래했음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동시에 그 은혜를 거절하는 죄를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은혜로운 말씀을 놀랍게 여기면서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에는 친숙함에서 오는 놀라움도 있었겠지만, 예수를 단지 자기들이 아는 목수 요셉의 아들로 제한하려는 태도도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은혜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이 자기 기대와 다르게 다가오면 쉽게 그분을 낮추어 판단합니다. 예수는 자신이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듣게 될 것을 아십니다.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고향에서도 보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이 요구 자체가 병 고침을 바라는 절박한 마음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요구 뒤에 있는 마음을 아십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보다, 기적을 통해 예수를 자기 고향의 자랑거리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기적은 믿음을 강요하는 공연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이는 표지이며,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표적을 보려 하기 전에 표적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의 두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는 시돈 땅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엘리사 시대에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방인을 더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미워하신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신앙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셨던 구약의 역사를 상기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혈통과 자격, 종교적 소속에 매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이었지만, 언약의 은혜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과부와 나병 환자에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전체에서 점차 드러날 복음의 넓이를 예고합니다. 예수의 복음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지만, 이스라엘의 배타적 특권을 보장하는 도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은혜는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크게 화를 냅니다. 처음에는 예수의 은혜로운 말씀을 칭찬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리려 합니다. 인간의 죄는 은혜를 듣고도 자기 자랑을 꺾지 못할 때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만과 배타성을 드러내시면 분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절당하신 것은 말씀을 잘못 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이 죄인의 마음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십니다. 누가는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의 죽음은 분노한 군중이 정한 시간이나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제거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폭력보다 앞서 갑니다. 예수께서는 거절당하시는 메시아이시며, 바로 그 거절과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십니다.
말씀과 권세로 어둠을 물리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눅 4:31-44)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그의 교훈에 놀랍니다. 이는 그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로, 단순히 말솜씨가 좋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랍비들의 견해를 빌려 자신의 가르침을 정당화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듣는 사람의 삶을 심판하고 살리며, 어둠의 권세를 흔드는 말씀입니다.
회당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러운”이라는 말은 귀신의 도덕적·영적 타락과 하나님 앞에서의 부정함을 나타냅니다. 귀신은 큰 소리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외칩니다. 귀신은 예수가 누구이신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의 정체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분께 항복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른 것은 매우 중요한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귀신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귀신의 증언을 자신의 사역의 근거로 삼지 않으십니다. 거짓과 파괴의 영은 참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은 귀신들의 공포 섞인 외침으로 정의될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가는 그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지만, 그를 상하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의 권세는 단지 귀신과 대등하게 겨루는 힘이 아닙니다. 그분은 명령하시는 분이고, 귀신은 떠나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라고 놀랍니다. 예수의 말씀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실제로 어둠을 물리치는 권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각 속의 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며 임하는 실제적 통치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악의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뿐 아니라 악한 영의 실재와 그 파괴적 활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정신적 고통, 모든 갈등을 성급하게 귀신의 역사로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누가복음은 귀신 들림과 질병을 구별하여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정죄하거나 공포에 가두는 분이 아니라, 악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주이십니다. 교회 역시 두려움을 조장하기보다 말씀과 기도, 복음의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합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니 병이 떠나가고, 그 여인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듭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열병을 꾸짖으신 것은 병을 귀신으로 단정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누가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과 병을 고치시는 사건을 구별합니다.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에도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시몬의 장모는 고침을 받자마자 예수를 섬깁니다. “수종들다”는 헬라어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로, 섬기고 돌보는 일을 뜻합니다. 그의 섬김은 병 고침의 대가가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감사로 드리는 자연스러운 응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실 때, 그분은 우리를 자기중심적 삶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로 교회와 이웃을 섬기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러나 섬김은 자신을 증명하려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먼저 사랑받은 자의 기쁜 응답이어야 합니다.
해 질 무렵 사람들이 각색 병으로 앓는 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옵니다. 안식일이 해 질 때 끝나므로, 사람들이 그 이후에 병든 자들을 데려왔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십니다. “각 사람”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긍휼이 군중을 향한 막연한 관심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아시고 가까이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작고 평범하여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할 때가 있지만, 예수께서는 각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는 구주이십니다.
많은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어 말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만 침묵을 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정치적 해방자나 기적을 행하는 인기 있는 지도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의 메시아 사역은 말씀과 이적으로 시작되지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귀신들의 외침이나 군중의 열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길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는 나가 한적한 곳에 계십니다. 많은 사역과 병 고침, 귀신 축출 뒤에도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십니다.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반복하여 보여 줍니다. 사역의 능력은 군중의 요구에 끌려다니는 데서 나오지 않고, 아버지와의 교제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찾아와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만류합니다. 그들의 필요는 실제였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지역의 요구에만 묶이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받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여야 하리니”에는 헬라어 데이(δεῖ), 곧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의 사역은 사람들의 기대나 인기의 흐름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병 고침과 귀신 축출은 그 복음의 진실성을 보이는 표지이지만, 표적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시고, 그 나라를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실 분입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전파하셨다고 기록하며 장을 마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한 도시와 한 계층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분의 길은 결국 예루살렘을 향하고 십자가를 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실패의 끝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선언이 가장 깊은 방식으로 성취되는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로 죄의 포로를 풀어 주시고, 죽음의 어둠에 갇힌 자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십니다.
결론
누가복음 4장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예수께서는 배고픔과 권력과 명예의 시험 앞에서 말씀에 순종하신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사람들의 환호와 기적 요구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은혜의 말씀을 들었지만 자기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여 예수를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그리스도를 내 필요를 해결해 줄 도구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죄와 사탄의 권세, 자기중심적 욕망의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 주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때에는 자신의 힘과 계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세상의 권세와 성공 앞에서는 하나님만 예배해야 합니다. 또한 고침과 회복의 은혜를 입었다면 시몬의 장모처럼 감사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아픔이 있다 해도, 말씀과 권세로 어둠을 물리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길로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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