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13 – 24:35 묵상,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마음이 뜨거워지던 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단순한 만남의 장면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의심에서 믿음으로 변화되는 여정을 보여주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35절까지의 이 본문은 부활의 실제성과 말씀의 능력, 그리고 공동체적 신앙의 회복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는지를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엠마오 길, 절망을 안고 걷는 사람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 24:13-14)

제자들은 부활 소식을 들은 그 날에,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슬픔과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걷는 길은 단순히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믿음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심리적 탈주였습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을 두고, “신자는 때로 주님의 약속이 보이지 않을 때, 은혜의 중심을 벗어난 길로 향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절망은 종종 우리를 스스로의 판단에 가두며,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실망에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5-16절). 여기서 “눈이 가리워졌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ἐκρατοῦντο(에크라툰토)”, 수동태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시선을 잠시 가리셨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단지 무지 때문이 아니라, 계시의 때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보여줍니다.

말씀으로 열리는 눈, 성경이 비추는 그리스도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5-26)

예수님은 제자들의 탄식을 다 들으신 후, 책망보다는 사랑으로 그들의 시선을 바로잡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첫 사역은 기적이나 현현이 아니라,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나타난 자신에 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27절).

이 장면은 개혁주의 신학의 해석 중심축을 잘 보여줍니다. 칼뱅은 이 구절을 주석하며,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말씀 안에서만 참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깨우치셨습니다. 이는 설교의 본질이 감성 자극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철저한 말씀 중심이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말씀의 해석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32절에서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은 단지 머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매튜 헨리는 이것을 두고 “참된 설교는 지성에 빛을 비추는 동시에 심령에 불을 붙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내면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의 위로나 외적 기적이 아니라, 성경을 통한 예수님의 부활의 해석이었습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떡을 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눅 24:30-31)

엠마오에 도착한 제자들은 낯선 이방인을 더 머물게 합니다. 그들이 주도적으로 요청한 이 장면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환대와 함께하는 식탁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떡을 떼셨고,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는 단지 식사의 순간이 아니라, 성찬의 예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이 장면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임재는 말씀과 떡 나눔 속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떡을 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렸다는 이 구절은 단지 물리적인 시야의 회복이 아니라, 믿음의 눈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서 말씀으로 뜨거워졌던 마음이, 이제 실제적인 주님의 손길 앞에서 확신으로 바뀝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자, 그분은 곧 그들에게서 떠나십니다. 이는 육신적 현존보다 더 깊은 임재, 곧 말씀과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보여줍니다.

말씀이 뜨겁게 했고, 떡을 떼실 때 눈이 밝아졌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들이 방금 걸었던 11킬로미터의 길을 어둠 속에서도 거침없이 달려갔습니다. 이제 더는 절망 속 탈주가 아닌, 부활의 증거를 가진 증인의 걸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자는 더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다시 복음의 자리로, 공동체로 돌아갑니다.

전체 마무리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35절까지는 단지 두 제자의 회복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는 오늘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절망에 빠져 엠마오로 향하던 그 길은, 때로 신자가 믿음 없이 현실을 해석하려 할 때 걷는 낯선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길에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떡을 떼는 공동체의 자리에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하시고, 성도의 교제 안에서 눈을 밝히십니다. 복음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예루살렘으로, 의심에서 확신으로, 혼자의 길에서 공동체의 삶으로. 이 길 끝에서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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