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26-43 묵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십자가 위에서 흘러나온 은혜

본문 요약 (누가복음 23:26-43)
예수님은 십자가 형을 집행받기 위해 골고다로 향하십니다. 그 길에서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며, 예수님은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해 심판의 날을 경고하십니다. 그분은 두 죄인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조롱을 받으시며, 한 강도의 회개와 믿음을 받으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장면은 고난 속에서도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보여줍니다.

본문의 구조

  • 구레네 시몬과 예루살렘 여인들 (23:26-31)
  • 골고다 언덕과 십자가 처형 (23:32-33)
  • 조롱당하는 예수와 한 강도의 회개 (23:34-43)

십자가의 길, 함께 짊어진 짐

26절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그 길은 로마의 처형 방식 중 가장 고통스러운 길이며, 형틀을 직접 지고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육체는 이미 심하게 지쳐 있었고, 군사들은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다가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여기서 ‘억지로 지게 하다’는 헬라어 ‘ἐπιτίθημι’(epitithēmi)는 물리적으로 강제하다, 짐을 얹히다라는 의미입니다. 시몬은 본의 아니게 십자가를 짊어졌지만, 복음서는 그를 복음의 여정 안에 등장하게 하며, 그의 이름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기억되는 인물이 됩니다.

십자가는 단지 무게가 있는 형틀이 아니라, 죄의 무게와 인간의 저주를 상징하는 짐입니다. 시몬이 진 것은 단순히 예수의 무게를 덜어주는 일이 아니라, 죄 없는 자의 고난을 인간이 함께 진 사건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제자도(discipleship)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눅 9:23)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구현하는 행위가 시몬의 모습에 담겨 있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슬피 울며 예수를 따랐고, 이는 단순한 감정적 연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십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30절에서 인용된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더러 우리를 덮으라”는 표현은 호세아서 10장 8절의 말씀으로, 고통을 피할 수 없을 만큼 큰 재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들에게 단순한 감정적 동정을 넘어, 회개와 신앙의 눈으로 시대를 바라보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분의 고난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구속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슬픔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죄에 대한 탄식, 멸망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겸손해지는 마음이야말로 참된 회개의 태도입니다.

골고다, 죽음을 넘는 사랑

32절부터는 예수께서 두 행악자와 함께 죽음을 향해 골고다에 이르신 장면이 그려집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은 히브리어로 ‘골고다’이며, 이는 해골 모양의 바위가 있는 언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이는 이사야 53장 12절에서 예언된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 죄인과 동일한 자리로 내려오신 것은 단지 형벌의 일환이 아니라, 죄인들의 자리에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33절은 짧지만 무게가 큰 구절입니다. “거기 이르러 그들을 십자가에 못박고”에서 ‘못박다’는 헬라어 ‘σταυρόω’(stauroō)로, 단순히 죽이다가 아니라,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매달아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며, 고통과 조롱 속에서 형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틀이 아니라, 죄와 사망을 이기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죄짓는 자들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여기서 ‘사하여 주옵소서’는 헬라어 ‘ἀφίημι’(aphiēmi)로, 죄를 덮어주고 보내주며 완전히 용서한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조건 없는 은혜입니다. 죄인들이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때, 그들을 위해 드린 이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전체를 요약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눴고, 백성들은 그를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고 조롱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역시 “그가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라면 자신을 구원하라”고 외칩니다. 여기서 ‘택하신 자’는 헬라어 ‘ἐκλεκτός’(eklektos)로,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세상의 방식으로 이해했기에, 십자가에서 침묵하시는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회심, 낙원의 약속

예수님과 함께 있던 두 행악자 중 하나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조롱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으며,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자신의 구체적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반면 다른 한 행악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향해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의 말에서 ‘옳지 않은 것’은 헬라어 ‘ἄτοπος’(atopos)로, ‘부적절한, 죄가 되는, 잘못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는 예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억하소서’는 헬라어 ‘μνησθῇτι’(mnēsthēti)로, 단순한 기억 이상의 의미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간청이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복음 전체를 함축한 선언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헬라어 ‘παράδεισος’(paradeisos)로, 본래 페르시아식 왕의 정원을 뜻하지만 신학적으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안식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히 미래의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함께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는 구원의 시제가 현재임을 강조합니다.

한 죄인은 십자가에서 생명의 문을 발견했고, 그는 아무 공로 없이 은혜로 천국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는 인간의 구원이 어떤 조건이나 행위에 근거하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죄를 인정하고,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는 낙원의 문이 열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23:26-43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과 함께 그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줍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지만 은혜의 자리로 초대받았고, 예루살렘 여인들은 감정적 울음에서 영적 회개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골고다에서는 죄인들의 조롱과 조소 속에서도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고, 한 강도는 인생 마지막 순간에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그 위에서는 죄가 용서되고, 구원이 선포되며,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임합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감정의 동정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으로, 회개의 눈물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이 우리의 고백 속에 살아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실패와 죄, 그리고 상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은혜는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이며,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선포입니다. 오늘도 그 길을 걸으며, 그 사랑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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