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1-25 묵상, 빌라도와 헤롯

진리를 외면한 정의, 그리고 거절당한 의로움

본문 요약 (누가복음 23:1-25)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빌라도에게 넘겨지시고, ‘백성을 미혹한다’는 정치적 죄목으로 고소당하십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무죄함을 알고도 군중의 소리에 밀려 그분을 헤롯에게 보냈다가 다시 돌려받습니다. 결국 그는 바라고라 하는 살인자를 석방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줍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고난과 인간의 부패한 정의 체계를 드러냅니다.

본문의 구조

  • 예수에 대한 고발과 빌라도의 1차 심문 (23:1-5)
  • 헤롯 앞에 선 예수 (23:6-12)
  • 빌라도의 변명과 군중의 선택 (23:13-25)

정치의 법정 앞에 선 진리

본문은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라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무리’는 단순한 대중을 넘어서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민중을 포함합니다. 그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유대의 종교법을 근거로 예수를 죽이고자 했지만, 로마의 권한 없이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기에, 이제 정치적 죄목을 만들어 빌라도 앞에 예수를 세웁니다.

그 고발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둘째,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셋째, “자칭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이 세 가지 중 첫 두 가지는 로마 정부에 대한 도전이며, 마지막은 종교적 선언입니다. ‘미혹하다’는 헬라어 ‘διαστρέφω’(diastrephō)는 본래 ‘비틀다, 왜곡하다’는 의미로, 예수가 백성의 정신과 태도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오히려 진리를 곧게 하셨지만, 그들은 그분의 말을 거꾸로 비틀어 고소합니다.

빌라도는 정치적 지혜와 계산 속에서 예수를 심문합니다. 그러나 4절에서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는 그의 첫 번째 판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죄를 찾다’는 헬라어 ‘αἴτιον’(aition)은 단순한 실수나 윤리적 잘못이 아니라 법적 유죄를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법적으로 예수가 처벌받을 이유가 없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무리는 “그를 갈릴리에서부터 유대까지 가르치며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라고 맞섭니다. 이들은 예수를 폭동의 주동자로 몰고 가려 합니다. 여기서 ‘소동하게 하다’는 ‘ἀνασείω’(anaseiō)로, 군중을 선동하여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진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이 이제는 세상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자로 몰리는 장면은, 정의가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현실입니다.

빌라도는 그 말을 듣고 예수가 갈릴리 출신임을 확인하고는, 그의 관할권을 가진 헤롯에게 예수를 보내는 것으로 책임을 피하려 합니다. 여기서 정치적 계산과 종교적 탐욕이 맞물리며, 진리의 재판은 점점 더 외면당하게 됩니다.

헤롯 앞에 선 침묵하시는 왕

헤롯은 예수를 보자 매우 기뻐합니다. “그가 예수를 보고 싶어 했던 까닭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고, 무슨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볼까 하여”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경외가 아니라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세속 권력이 영적 진리를 얼마나 가볍게 다루는지를 상징합니다.

헤롯은 많은 말로 질문하지만 예수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누가는 9절에서 이를 강조합니다. 이 침묵은 단순한 무반응이 아니라, 헤롯의 마음에 진리가 들어갈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주님의 판단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의 고난 받는 종의 예언처럼, “그는 잠잠하며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이 여기서 성취됩니다. 헬라어로 ‘σιγάω’(sigaō), 침묵하다의 행위는 복음서에서 종종 하나님의 주권적 판단이 표현될 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헤롯과 그의 군인들은 예수를 업신여기고 희롱합니다. 이는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조롱하는 영적 반역입니다. 왕의 옷을 입히고 되돌려 보내는 이 장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얼마나 왜곡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왕이심에도 왕으로 대접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인간의 인정을 통해 증명되지 않으며, 고난을 통해 드러납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그 전에는 원수였으나, 이날부터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됩니다. 진리를 외면한 권력자들이 이제 연대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난 연합이지만, 이는 악한 자들의 결탁입니다. 정의가 침묵하고 진리가 배척당할 때, 세상은 겉보기엔 조화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무질서와 죄의 연합입니다.

군중의 외침과 뒤바뀐 판결

13절부터 빌라도는 다시 예수를 심문하고 군중 앞에 섭니다. 그는 자신과 헤롯이 보기에 예수가 죽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거듭 선언합니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무죄를 선언합니다. 성경은 그 반복을 통해 예수님의 절대적인 무고함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빌라도는 ‘징계하고 놓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지만, 군중은 거세게 반발합니다.

이때 누가는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이르되”라고 묘사합니다. ‘일제히’라는 말은 헬라어 ‘ἐπιφωνέω’(epiphōneō)로, 집단적 압력과 군중의 일치된 소리를 나타냅니다. 이는 마치 한 목소리처럼 들렸겠지만, 그 배후에는 분노와 선동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으라”는 요청은 가장 비극적인 교환을 상징합니다. ‘바라바’는 ‘살인과 밀란으로 감옥에 갇힌 자’로, 로마법상 분명한 죄인입니다.

예수를 놓고 바라바를 선택한 군중의 선택은 단지 감정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는 진리를 거절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본래 유월절의 은혜, 곧 죄인의 석방이라는 상징 속에 자리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유월절의 상징은 역설적으로 성취됩니다. 죄인은 풀려나고, 죄 없는 분은 십자가로 가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심장입니다. 우리가 살아나기 위해, 죄 없으신 분이 죽으셔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째로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며 ‘놓아주고자’ 하였으나, 결국 군중의 소리에 밀려 예수를 내어줍니다. 24절의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라는 구절에서 ‘언도하다’는 헬라어 ‘ἐπέκρινε’(epekrine)는 공식적인 재판의 결정을 의미합니다. 정의의 자리에서 권력은 진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군중의 외침이 결국 죄 없는 이를 십자가로 몰아가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결론

누가복음 23:1-25은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통해 인간 사회의 부패한 정의와 진리의 침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정치의 법정에서, 권력의 유희 속에서, 그리고 군중의 외침 가운데 철저히 외면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외면과 부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알았지만 끝까지 지키지 못했고, 헤롯은 진리를 희롱했고, 군중은 죄인을 놓아달라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로 향했고, 그 길은 곧 우리의 구원을 향한 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바와 같은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놓여났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진리를 외면하고 정의를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침묵하시며,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분의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순종이며, 그 고난은 실패가 아니라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억울함이 있어도 침묵으로, 조롱당해도 믿음으로, 외면당해도 사랑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 끝에 십자가가 있지만, 동시에 부활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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