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54-71 묵상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

배신의 밤, 침묵하시는 진리

본문 요약 (누가복음 22:54-71)
예수께서는 체포되신 후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시고,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가 대문 안 불가에 앉습니다. 그 자리에서 세 번 예수를 부인하고, 닭이 우는 순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합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조롱과 폭행을 당하시며 신성모독 혐의로 공회에서 심문받으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오히려 그들의 정죄의 이유가 됩니다.

본문의 구조

  • 베드로의 세 번 부인과 회한 (22:54-62)
  • 예수에 대한 조롱과 폭행 (22:63-65)
  • 공회 앞에서의 신문과 예수님의 자기 선언 (22:66-71)

베드로, 멀찍이 따르다

예수께서 체포되신 후, 54절은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로 시작됩니다. 이 한 문장은 베드로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멀찍이’는 헬라어 ‘μακρόθεν’(makrothen)으로,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마음의 거리까지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그는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서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를 향한 충성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순된 마음이 그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불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 틈에 앉은 베드로는 따뜻함을 얻기 위해,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숨기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부인은 여종의 지적에서 시작됩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는 “여자여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합니다. 여기서 ‘알다’는 헬라어 ‘οἶδα’(oida)는 단순한 지식 이상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예수를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또 다른 사람이 “너도 그 도당이라” 말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대답합니다. 마지막으로는 한 시간이 지난 뒤 또 한 사람이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갈릴리 사람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네 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부인합니다. 이 세 번의 부인은 점점 더 강해지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는 듯한 격렬함으로 표현됩니다.

그 순간 닭이 울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61절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는 장면은 말 없는 눈빛의 교차 속에 모든 감정이 응축되어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돌이켜’는 헬라어 ‘ἐπιστρέφω’(epistrephō)로, 단순한 몸의 방향 전환이 아니라, 영혼을 향한 시선을 의미합니다. 그 시선에는 책망보다 사랑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 ‘통곡하다’는 헬라어 ‘κλαίω’(klaiō)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분출을 뜻하며,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회한의 폭발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인간의 연약함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곧 회개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눈물로 무너졌지만, 그 눈물은 다시 일어나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미리 아셨고, 그를 위해 기도하셨으며, 이후 그를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침묵 속에 드러나는 고난의 진리

63절 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치와 폭력이 기록됩니다.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라는 말은 단순한 폭행 이상의 고의적 모욕을 포함합니다. 로마의 법정 절차와는 다르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신속히 제거하려는 목적 아래 법적 절차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의 조롱은 예수님의 신성을 조롱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로 이어집니다. 눈을 가린 채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말한 자들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아니라고 확정하려는 마음의 왜곡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노릇’하는 자로 조롱하며,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판단 기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그들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판단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폭력은 육체적 행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는 영적 폭력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조롱과 고통 가운데 침묵하십니다. 누가는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반응을 거의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그 침묵의 무게를 강조합니다. 이 침묵은 두려움의 결과가 아니라, 구속의 사명을 향한 단호한 순종입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는 이 침묵은, 인간의 죄에 대한 가장 깊은 답변이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공회 앞에 선 진리의 증언

66절부터는 공회, 즉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심문이 시작됩니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라는 구절은 유대 종교 권력의 총체적 거절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예수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정죄하기 위한 유도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지혜로 가득 찬 대응입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 참된 대답을 주시기보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정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이후에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여기서 ‘권능’은 헬라어 ‘δυνάμεις’(dynameis)이며, 하나님의 권세와 심판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편’은 권위와 영광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즉, 예수께서 스스로를 단지 선지자가 아니라, 다니엘서 7장에 나타난 인자이며,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하시는 분으로 밝히신 것입니다.

모든 유대 공회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메시아적 고백이면서 동시에 신성의 선언이기도 했기에, 이 말은 예수를 정죄할 수 있는 결정적 구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은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로, 말 그대로 “너희가 말하기를 내가 그라고 하는구나”라는 뜻입니다. 이는 부정이 아니라, 그들의 고백에 담긴 의미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간접적인 긍정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증거가 필요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했으며, 그를 제거할 정치적 명분을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 앞에서, 인간의 종교적 권위는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며 진리를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진술은 침묵을 깨는 외침입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자라고 밝히는 이 선언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지만, 동시에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결론

누가복음 22:54-71은 가장 어두운 밤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진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인간의 연약함을, 예수님의 침묵은 신적 인내를, 공회의 심문은 진리를 외면한 자들의 완고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장면 위에 흐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입니다.

베드로는 부인했지만 회개했고, 그 회개는 이후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조롱받으셨지만 침묵하셨고, 그 침묵은 세상을 향한 사랑의 무게를 드러냅니다. 공회는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의 고백은 오히려 생명의 선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멀찍이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진리 앞에서 침묵하거나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하고 부인할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시며 회복의 눈빛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 시선을 피하지 말고, 눈물로 응답하며 다시 주님의 길을 따르길 바랍니다.

진리는 침묵 속에서도 꺾이지 않으며, 배신과 고난 속에서도 생명을 이룹니다. 예수님의 고백은 사망을 넘어 부활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고백에 응답하는 자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 고백 앞에 서서, 우리는 다시 주님의 길을 따릅니다. 침묵하셨던 그분이 결국 우리의 구원의 이름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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