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식탁, 은혜의 언약
본문 요약 (누가복음 22:1-23)
무교절이라 하는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고,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 예수를 배반할 계획이 실행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신 후, 마지막 만찬을 통해 자신이 고난당할 것과 새 언약을 말씀하시며,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팔 것이라 예고하십니다.
본문의 구조
- 유월절을 앞둔 음모와 유다의 배반 (22:1-6)
- 유월절 만찬의 준비와 의미 (22:7-20)
- 제자 중 배신자가 있을 것이라는 선언 (22:21-23)
어둠 속에서 꾸며진 음모
누가복음 22장은 ‘유월절’이라는 결정적인 시간표로 시작됩니다. 1절에서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절기의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음을 알리는 서곡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기의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로 죽음의 심판을 피하고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바로 그 날, 진짜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죽임당할 예정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시간 계획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2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도를 구하나 무리를 두려워했다고 나옵니다. 이들은 공공연히 예수를 정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과 능력에 감동받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은밀하게 음모를 꾸며야만 했고, 그 음모는 결국 유다의 배신을 통해 실행됩니다. 여기서 3절은 무섭고도 중요한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사탄이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들어가니”라는 구절입니다.
‘들어가다’라는 말은 헬라어 ‘εἰσέρχομαι’(eiserchomai)인데,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의 지배가 아니라, 인격 안으로 침투하여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유다는 단순히 유약하거나 마음이 흔들린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과 완고함을 통해 사탄에게 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예수와 3년을 함께했지만, 그의 마음은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과 생명에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승을 은 삼십에 팔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과 거래합니다. 이 은밀한 거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합의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기이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유다가 음모를 꾸밀 동안,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십니다. 어둠의 세력이 움직이는 동안, 빛은 마지막 사랑을 베풀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마지막 만찬에 담긴 언약의 의미
7절부터는 유월절 식사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제자들이 “우리가 어디서 유월절을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묻자, 예수께서는 세밀하게 준비된 장면을 제시하십니다. 이는 단지 사전 계획이 잘 짜였다는 의미를 넘어서, 예수님께서 이 고난의 시간조차 주도하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놓으실 준비를 이미 하셨습니다.
14절, 때가 이르자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때’는 헬라어 ‘ὥρα’(hōra)로, 일반적인 시간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 곧 ‘카이로스’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속의 완성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15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원하다’는 헬라어 ‘ἐπιθυμία’(epithymia)는 강한 갈망, 마음 깊은 곳의 열망을 나타냅니다. 곧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진심 어린 고백이며, 제자들과의 마지막 교제를 간절히 원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전통적으로 유월절은 과거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자리였지만,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몸과 피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시며 그것을 미래의 구속사로 확장하십니다. 19절의 “떡을 가지사…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는 말씀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주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δίδωμι’(didōmi)로, 희생을 동반한 능동적인 증여를 뜻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것은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20절에서 잔을 가리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신 말씀은 예레미야 31장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새 언약’은 헬라어로 ‘καινὴ διαθήκη’(kainē diathēkē)인데, 이전 율법 중심의 언약이 아닌, 예수의 피를 근거로 한 은혜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이는 더 이상 동물의 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으로 모든 인류의 죄가 덮이는 은혜의 약속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단순히 음식이 아닌, 자신의 생명과 그 피로 이루어진 구원의 실재를 나누셨습니다. 이 식탁은 고난의 자리였지만, 동시에 새 생명이 시작되는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배신자와 함께 앉은 식탁
21절부터는 분위기가 급격히 전환됩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라는 선언은 모든 제자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식탁에서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포용이자,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파는 자’는 헬라어로 ‘παραδίδωμι’(paradidōmi)인데,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넘겨주다, 넘기다라는 뜻으로, 예수의 죽음을 위한 인도함을 포함하는 복합적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는 예수를 팔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 그를 넘긴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섭리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인자는 이미 정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신 말씀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악한 방식으로 사용한 자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묻음을 당합니다.
23절에서 제자들이 서로 누가 그런 일을 할까 의논하더라는 구절은, 이 식탁의 분위기가 얼마나 긴장감 속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의심과 연약함은 사랑의 식탁 한복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조차도 예수께서는 품으셨습니다. 식탁에서 유다를 끌어내지 않으신 이유는, 끝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고, 제자들에게 은혜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론
누가복음 22:1-23은 예수님의 고난이 단순히 운명처럼 다가온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안에 있는 자발적 순종의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배신, 만찬이라는 서로 상반된 주제들이 한 본문에 담겨 있는 것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가 교차하는 지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도 두려움에 떠는 대신,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통해 사랑을 나누시고, 새 언약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식탁에는 배신자도 함께 앉아 있었고, 예수님은 그를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끝까지 기다리셨고, 끝까지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며, 은혜의 깊이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 식탁에 초대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때로 유다처럼 주님을 팔기도 하고, 제자들처럼 주님의 마음을 몰라 헤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몸과 피를 다시 내어주십니다. 그 식탁은 지금도 우리 앞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그 은혜 위에 다시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세워진 이 새 언약은, 인간의 배신도, 세상의 어둠도 무너뜨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언약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를 깨닫고 돌이키며, 다시 그 식탁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와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그 은혜는 식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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