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는 자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논쟁은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으셨고, 이제는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20장 19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지혜가 어떻게 사람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며, 살아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보여줍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논쟁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에 속해 있고 누구를 향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선명히 보여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진리를 묻는 가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방금 전 하신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겨냥한 것임을 알고는 그분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을까를 궁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덫에 걸기 위해 간교한 질문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눅 20:22). 표면상으로는 윤리적 혹은 율법적 질문 같지만, 그 속에는 정치적 함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이며, 세금은 유대인들의 뼈아픈 현실을 상징하는 요소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배신자로 보일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반역하는 자가 되어 고발당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함을 아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눅 20:25).
이 말씀은 단순히 세속 권력과 신앙의 이중적 구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바치다’는 단어 ‘ἀπόδοτε'(apodote)는 ‘되돌려 주다, 합당하게 돌려주다’라는 뜻입니다. 곧, 가이사의 형상이 있는 것은 그에게 돌려주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존재는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깊은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가 진정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그 지혜에 놀라 말문이 막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의 시간과 물질, 재능과 생명은 누구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세상의 통치 아래 머물되, 내 영혼은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이 질문은 지금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부활의 논쟁, 삶의 본질을 묻다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나섭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율법은 존중하지만, 부활이나 천사, 영의 존재는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은 예수님을 논리로 제압하려는 마음으로 접근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계명을 예로 들며,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후 모두 죽었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던집니다. “그들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 누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되리이까?”(눅 20:33).
그들의 질문은 부활 자체를 조롱하고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를 정확히 짚으십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제도와 질서를 그대로 부활 이후에도 적용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눅 20:34-35).
여기서 ‘저 세상’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ἐκεῖνος ὁ αἰών'(ekeinos ho aiōn)으로, 시간의 연속 안에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의 생명이 단순히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님을 선포하십니다. 부활의 생명은 새로운 질서와 존재 방식 속에 있으며, 죽음이 더 이상 주권을 갖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을 수도 없고,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눅 20:36).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단지 위로의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이 땅의 가치를 궁극적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자기 인생의 끝을 묘비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무지를 지적하며, 출애굽기 속 모세의 이야기를 인용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그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눅 20:37-38). 여기서 강조되는 진리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자들의 하나님이시며, 그분 안에서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침묵하는 자들, 마음이 막힌 자들
이 대답을 들은 서기관 중 몇몇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눅 20:39). 그러나 그 말 속에는 경외심보다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패배의 수긍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감히 질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진리가 그들의 모든 이론과 논리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침묵이 참된 경청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잠시 멈추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인정했지만, 그 진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종교적 형식 속에 갇힌 이들의 위선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지식으로만 인정했지, 생명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지만, 진리가 우리의 삶을 흔들지 못할 때, 우리는 그저 조용히 침묵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 너는 나를 믿느냐?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느냐?
우리의 신앙은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어떤 형상 아래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진리를 묻는 자인가, 진리를 피하는 자인가? 나는 살아 있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있는가?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누가복음 20장 19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은 단순한 논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각자의 진실한 신앙이 드러나는 시험입니다. 가이사의 형상은 동전에 새겨졌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존재 안에 새겨졌습니다. 그분께 돌려드릴 것은 동전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존재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하며,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존재임을 확신하게 합니다. 그 확신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용기가 되고,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의 근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그 진리를 따라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문입니다. 그 은혜 안에 머물며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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