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 – 20:18 묵상

포도원의 주인을 거부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셨을 때, 그분의 눈빛은 단호하면서도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0장 1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은 그 마지막 절정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인간의 반응과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깊은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 권위를 주었는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다가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눅 20:2).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그분의 사역 전체를 거부하는 공격입니다. 여기서 권위라는 단어, 헬라어로 ‘ἐξουσία'(exousia)는 단순한 권한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갖는 본질적 주권과 권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에게서냐?”(눅 20:4). 이는 지혜로운 역질문이며, 그들의 마음속 의도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논의하며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침묵은 진리에 대한 거부이며, 두려움에 기반한 기회주의적 태도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거짓된 마음에 진리를 억지로 주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인간의 승인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본질적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거룩한 질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권위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겸손히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포도원 비유에 담긴 하나님의 아픔

예수님은 이어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오랜 시간 타국에 머물렀다는 이야기입니다(눅 20:9). 이 장면은 이사야서 5장의 포도원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을 정성스럽게 가꾸셨지만, 그들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백성은 그들을 무시하고 때리고 심지어 죽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종들을 세 번이나 보냅니다. 이 반복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상징합니다. 선지자들, 곧 구약의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냅니다. 헬라어로 ‘ἀγαπητός'(agapētos), 곧 유일하고 깊이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주인은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눅 20:13). 그러나 농부들은 오히려 아들을 죽이고 그 유산을 차지하려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함으로 자신들의 통치를 지키려 합니다.

이 장면은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의 심장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끝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포도원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눅 20:16). 이는 이스라엘 종교 시스템의 종말과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의 확장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지만, 인간은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한 공의이며, 거부당한 사랑은 더 큰 심판이 됩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분을 존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제거하고 있는가?

버린 돌, 머릿돌이 되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끝에서 시편 118편 22절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눅 20:17). 이 말씀은 단순한 인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바로 그 버려진 돌이며,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의 중심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머릿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κεφαλὴ γωνίας'(kephalē gonias)는 건축에서 가장 중요하며 모든 구조를 지탱하는 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구원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이 무시한 그분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중심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8절의 말씀은 매우 강력합니다. “그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그 위에 떨어지는 자는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 20:18).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자들에게 임할 영적 파멸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위에 세워지든지, 그분에 의해 무너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의 기준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분 앞에서 사람은 무너지거나 새롭게 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전히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세우시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이 복음을 통해 오히려 부서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 20장의 말씀 앞에 서며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단지 성전에서 가르치신 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포도원의 주인의 아들이며, 버려졌지만 머릿돌이 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때,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분을 거부하는 농부들과 같은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여전히 나 자신은 아닌지,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주인이며, 너를 위해 나의 아들을 보냈노라. 그 음성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이제는 그분을 거부하지 말고, 우리의 삶의 머릿돌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분 위에 우리의 인생을 세워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포도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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