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들어가신 왕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은 단순한 입성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눈물과 탄식, 그리고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를 담은 구속의 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28절부터 48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과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한 왕의 등장과 그 왕을 맞이하는 백성의 반응,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겉으로는 환영의 외침이 있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불순종과 어두운 거절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통치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순종으로 준비된 입성의 길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셨을 때, 제자 둘을 보내시며 한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이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것이라고 명시됩니다. 여기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묘사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을 위한 거룩한 목적에 쓰이는 짐승은 반드시 아직 부정되지 않은 것이어야 했습니다(민 19: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의 성취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나귀를 끌고 옵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의 전지성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은 질문받을 상황을 미리 들었고, 그에 맞춰 대답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이 단순한 한마디는, 주인의 소유에 대한 권리보다 주님의 명령이 우선되는 신앙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모든 소유와 삶이 ‘주께서 쓰시겠다’는 명령 앞에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실 때, 많은 이들이 자기 겉옷을 길에 펴며 환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보내신 왕이심을 기대하며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는 시편 118편의 인용이자, 메시아를 향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외침은 곧바로 십자가의 함성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찬송은 온전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기 기대에 맞는 메시아를 향한 일시적 환호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예루살렘의 운명
예수님은 가까이 오셔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십니다. 본문 41절에 사용된 ‘우셨다’는 헬라어 ‘ἔκλαυσεν’ (에클라우센)은 조용히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강한 울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셨던 백성의 완악함에 대한 탄식이며, 곧 임할 심판을 향한 애끓는 마음이었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진정한 평화의 길,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한 것을 슬퍼하십니다. 그들은 성전과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눈앞의 화려함과 종교적 체계 속에서 하나님을 거부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 말씀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실제로 성전이 무너지고 도시가 황폐해진 사건의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흐름을 초월하여 그 중심에 계시며,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십니다. 그분의 통치는 자비와 진리, 그리고 심판과 회복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거룩을 회복하시는 주님의 분노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십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유일한 성전 정화 사건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겠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과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의 집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고발하는 선포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 곧 제사 시스템과 결탁한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이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거룩함은 이기심과 외식으로 오염되었고, 백성들의 신앙은 형식적 의무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거룩함을 회복하려는 의로운 진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집을 그분의 뜻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때로 단호하게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민중의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 꾀하지만, 백성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랐기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합니다. 이 장면은 복음의 힘과 말씀의 권세가 어떠한 억압 속에서도 사람들의 심령을 흔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진리는 결코 묻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변화와 저항, 그리고 결국에는 회복이 뒤따릅니다.
결론: 왕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누가복음 19장 28절부터 48절은 단순한 입성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통치하시는 왕의 등장과, 그 왕을 진심으로 맞이하지 못한 도시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나귀를 타고 오셨고, 눈물을 흘리며 들어오셨으며, 성전을 청소하시고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진정한 왕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심령에 거하실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맞이하고 있는가? 내 삶의 나귀는 과연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의 성전, 곧 신앙의 중심은 참으로 기도의 집으로 세워져 있는가?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오십니다. 그분의 눈물은 여전히 흘러내리며, 우리의 회개와 돌이킴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앞에 옷을 벗어 깔기보다, 우리의 마음을 찢고 그분을 맞이하는 진실한 예배자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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