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앞에 두고 계시던 때, 사람들의 기대는 매우 뜨거웠습니다. 많은 이들은 예수님이 당장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가 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비유를 드십니다. 누가복음 19장 11절부터 27절까지 기록된 ‘문화의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과 그때까지의 제자들의 삶에 대한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나라를 받으러 간 귀인과 남겨진 종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는 한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청중은 이 비유의 배경을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헤롯 대왕의 아들 아켈라오도 로마로 가서 유대 지역의 통치권을 요청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당신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귀인은 떠나기 전에 종 열 명에게 각각 한 문화(헬라어로 ‘μνᾶ’ 미나)를 나누어 주며 말합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여기서 ‘장사하라’는 말은 헬라어 ‘πραγματεύσασθε'(프라그마튜사스테)로, 단순히 보관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업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문화는 하나의 단위로 약 3개월 치의 임금에 해당하는 액수였습니다. 이는 주인이 종들을 신뢰하고, 그들이 책임감 있게 일하기를 기대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백성들, 곧 시민들이 그를 미워하여 사절을 보내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현실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러 가시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왕 되심을 거절합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인간의 본성과 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충성된 종과 무익한 종의 대비
귀인이 왕위를 받고 돌아왔을 때, 그는 종들을 불러 자신이 맡긴 문화로 무엇을 했는지 결산합니다. 첫 번째 종은 한 문화로 열 문화를 남겼습니다. 그는 단순히 주인의 명령을 따랐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뜻을 수행한 자였습니다. 주인은 그를 칭찬하며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십니다.
두 번째 종은 다섯 문화를 남깁니다. 이 종도 역시 충성된 자로 인정받고, 다섯 고을의 권세를 받습니다. 이 장면은 구원이 행위로 얻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실제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구원의 전적 은혜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 은혜가 반드시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지만,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행위로 증명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주인의 문화를 수건에 싸 두었다가 그대로 돌려줍니다. 이유는 단 하나, 주인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맡기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그의 말 속에는 주인에 대한 오해와 불신, 심지어는 비난이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해 주인은 그 종의 말 그대로 그를 판단하십니다.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고백과 삶에서 드러나는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했다고 했지만, 그 두려움은 믿음이 없는 자의 회피였고, 결국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책임 회피로 드러납니다. 주인은 그의 문화를 빼앗아 열 문화를 가진 자에게 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원리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곧 받은 것을 사용한 자는 더 받게 되고, 사용하지 않은 자는 그것마저도 빼앗긴다는 원리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재능을 발휘하라는 세속적 성공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사명, 복음의 진리를 삶에서 어떻게 살아내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복음을 맡기셨고, 그것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길 원하십니다. 게으른 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며, 현실의 책임을 외면한 자였습니다.
왕 되심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심판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종들과는 또 다른 집단을 향합니다. 바로 앞서 언급된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라고 외쳤던 시민들입니다.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사랑의 주님으로만 이해하고자 하지만, 그분은 동시에 공의로우신 심판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회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참으로 크고 넓지만, 그 은혜를 거절하고 끝내 반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이 심판은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일어날 영원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왕 되심을 부정하고, 복음을 거부하며, 자신의 길을 따라간 자들에게 분명한 결말이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경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나의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의 통치를 거부한 자에게 남는 것은 오직 심판뿐입니다.
결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충성된 청지기
예수님의 문화 비유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그것은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가 어떻게 이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문화를 받은 자들입니다. 어떤 이는 가정에서, 어떤 이는 직장에서, 어떤 이는 교회에서 복음을 맡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그분의 뜻을 따라 충성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반드시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무엇을 남기고 있습니까? 은혜를 받았지만 숨겨두고 있는 자는 아닌가요? 아니면, 작은 것에 충성하며 주님께 칭찬받을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오늘도 그 말씀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그날에 주님 앞에서, “잘하였다 착한 종아”라는 음성을 듣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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