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으시는 주님, 내려오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갈망은 자주 세상의 성공과 타협 속에 가려지고, 상처와 죄의 무게에 눌려 묻혀버립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은 그런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리고의 한 부자 세리장 삭개오, 그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결코 채울 수 없었던 내면의 빈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런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짧지만 깊은 이야기를 통해 구원과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갈망
누가는 삭개오에 대해 간단하지만 결정적인 묘사를 합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또한 부자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거두는 일을 맡은 자들로, 동족들에게는 배신자이자 탐욕스러운 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세리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ἀρχιτελώνης'(아르키텔로네스)로, 단순한 세리보다 더 높은 직급, 곧 여리고 지역의 전체 세금을 관리하고 중간 세리들을 감독하는 자였습니다. 여리고는 중요한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그 수익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위치와 부는 그의 내면의 결핍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갈망에서 비롯된 몸짓이었습니다. 그는 군중 속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조건, 즉 신체적 한계와 사회적 배척 속에서도 어떻게든 예수님을 보려는 집요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갈망은 우리 신앙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고, 만나고 싶고,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과 조건, 과거의 죄와 상처가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한계를 뚫고,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어린아이처럼 체면을 내려놓고, 무시받을 각오를 하고, 다만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행동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체면을 넘어서야 시작됩니다.
먼저 찾아오시는 예수님
삭개오가 올라간 그 뽕나무 아래에 예수님께서 이르셨을 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그 이름을 알고 계셨고, 그 위치를 아셨고, 그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단순한 방문 요청이 아닙니다. ‘유하다’는 헬라어 ‘μείναι'(메이나이)는 ‘머무르다’, ‘거하다’는 뜻으로, 단지 하루 묵는 것이 아니라 그와 깊은 교제를 나누고 삶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삭개오는 이 부르심 앞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니”라고 기록됩니다. 이는 단순한 행동 묘사가 아니라, 그의 마음의 변화를 상징합니다. 뽕나무 위에 있었던 삭개오, 곧 자신의 위치와 체면, 사회적 성공의 상징 위에 있었던 그는 이제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급히 내려와’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며 영접’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참된 믿음은 언제나 기쁨으로 동반됩니다.
그러나 군중은 이 장면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는 비난이 이어집니다. 이는 예수님께 향한 비난이자, 삭개오의 과거에 대한 고발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세리장’으로 보았고,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결단을 보시고, 그 중심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십니다. 이는 곧 성육신의 은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의 집에, 더럽고 추한 인생 속에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회개로 드러난 구원의 열매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고백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고백은 단순한 기부나 도덕적 반성 수준을 넘어서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토색하거나 속인 자는 원금에 20%를 더해 갚도록 했지만(레 6:5),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네 갑절’을 갚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회개의 진실성과 헌신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부를 나누겠다고 합니다. ‘소유의 절반’이라는 말은 상징적인 수사가 아니라 실제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결단입니다. 이는 복음의 진정한 열매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자는 삶의 영역에서 변화가 드러납니다. 물질, 관계, 시간, 목적—all 영역에서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을 듣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 선언은 삭개오의 신분 회복을 의미합니다. 사회적으로는 배척당한 자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언약의 백성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단순한 종결 선언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시며,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회개의 열매는 단지 눈물 흘리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결단이며, 복음은 그 돌이킴을 통해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결론: 예수님을 보기 원하십니까?
삭개오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죄인이 회개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음의 거울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 위에 서 있습니까? 성공이라는 뽕나무입니까, 체면이라는 가지입니까? 예수님을 보기 원한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름을 아시고, 상황을 아시고, 마음의 갈망을 아시며,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을 영접할 때, 진정한 기쁨이 회복되고, 진짜 회개가 일어나며,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삭개오처럼 내려오십시오. 그리고 즐거이 예수님을 맞이하십시오. 그때 당신의 집에도 오늘, 구원이 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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