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31 – 43 십자가 예고

십자가를 향한 길, 눈 뜬 자의 걸음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여정은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으로 점점 더 가까워집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부터 43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시고 이어 여리고에서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 두 장면은 서로 동떨어져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되며, 우리가 그 나라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예고,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이 말씀은 우연한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오래 전부터 계획된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기록된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선포이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필연적 사역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세부적으로 예언하십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능욕,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과 죽임을 당하나,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넘겨지다’는 헬라어 ‘παραδίδωμι’ (파라디도미)는 배신, 혹은 심판의 손에 넘기는 것을 의미하며, 단순한 운명이 아닌 의도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고난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누가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그들이 “이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말씀이 숨겨졌고, 그 뜻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는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고난과 죽음을 통한 구원의 방식은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오히려 그 말씀을 거부하고 혼란스러워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무지는 단지 지적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기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종종 그것이 우리 기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길이며,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만 깨달아지는 비밀입니다.

맹인의 외침, 눈을 뜨게 한 믿음

이제 장면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 여리고로 전환됩니다.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지나가는 무리의 소리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고 크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불쌍히 여기소서’는 헬라어 ‘ἐλέησόν’ (엘레이손)으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이 맹인은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릅니다. 이는 메시아를 향한 고백이며, 단순한 치유자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실 구원자로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시각장애를 가졌지만, 믿음의 눈은 열려 있었습니다.

그를 향한 무리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앞서가던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했지만, 그는 더욱 크게 외칩니다. 이는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예수님 외에는 길이 없음을 아는 절박한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멈춰 서시고 그를 데려오라 명하시며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단순하게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리고 즉시 그의 눈이 열립니다. 여기서 ‘구원하였다’는 말은 헬라어 ‘σῴζω’ (소조)로, 단순히 육체의 회복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는 육체의 눈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구원받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의 믿음은 단지 기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의탁이었습니다.

눈 먼 자와 눈 뜬 자, 누구인가?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맹인의 사건을 제자들의 무지와 병치시킵니다. 제자들은 눈을 떴지만 십자가의 의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 맹인은 육체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메시아를 보는 눈은 열려 있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전체의 주제, 즉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영적으로 실재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며, 진정한 믿음은 어떤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고백과 의탁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눈앞의 문제 해결입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까? 십자가의 고난 앞에 제자들은 혼란스러웠지만, 맹인은 그 고난을 넘어선 영원한 구원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눈을 떴지만 십자가를 보지 못한 제자들입니까, 아니면 눈을 감고도 예수님을 붙든 맹인입니까?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철저한 순종과 사랑의 여정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눈이 열려야 합니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제자가 되며,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결론: 십자가 앞에서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누가복음 18장 31절부터 43절까지는, 구속의 길과 구원의 응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지만, 맹인은 눈을 감고도 보았습니다. 그 차이는 단 하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의탁, 그분 외에는 길이 없음을 고백하는 신앙, 그것이 우리 눈을 열게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가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눈, 그 길을 따를 수 있는 순종의 눈을 주옵소서. 그 기도를 드리는 이에게, 주님은 오늘도 멈추시고, 손 내밀어 그 길에 함께하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는 결코 어둠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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