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소유한 자와 등 돌린 자
사람들은 저마다 천국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이 단순한 소망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5절부터 30절까지는, 천국을 누릴 자와 등 돌릴 자의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 같은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
본문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 곧 아기들을 데리고 예수께 오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기복적 목적이 아니라, 아이들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신앙적 열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꾸짖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아이는 미성숙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제자들의 반응은 사회적 통념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꾸짖음을 가로막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임이라.” 여기서 ‘어린 아이’는 헬라어로 ‘βρέφη’ (브레페)로, 젖먹이 아기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는 이들이 전적으로 타인의 돌봄에 의존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강조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받든다’는 헬라어 ‘δέχομαι’ (데코마이)는 환영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적극적인 수용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천국을 소유하는 자의 조건으로 단순한 겸손을 넘어, 전적 의존과 신뢰의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천국은 자격 있는 자의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무자격함을 인정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드러낼 수 없고, 오직 은혜에 기대어 나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열립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인간의 공로와 성취가 아닌, 전적인 은혜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어서 등장하는 부자 관원의 질문은 매우 정중하면서도 종교적 열심이 담긴 접근입니다. 그는 예수께 나아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언뜻 보기엔 신앙적으로 진지해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신학적 인식과 자기 이해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시며, 선함에 대한 기준을 재정립하십니다. 이는 곧 인간의 행위나 도덕성으로 영생을 획득하려는 사고방식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에 대해 관원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는 스스로의 의에 대한 확신과 자만이 묻어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여기서 ‘부족하다’는 헬라어 ‘λείπω’ (레이포)는 ‘결핍되다’, ‘빠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가장 본질적인 것, 즉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따르는 믿음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물질을 포기하라는 윤리적 요구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재물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진정한 주님을 따르라는 초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그에게는 많은 재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서 그는 ‘영생’을 원했지만, ‘예수님 따르기’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신앙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나라를 원하지만, 정작 그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필요한 결단 앞에서는 뒤로 물러서곤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나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반응을 보시고 안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라.” 여기서 ‘어렵다’는 헬라어 ‘δυσκόλως’ (뒤스콜로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난이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비유는 더욱 극적입니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은 단순한 과장법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부유함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제자들은 놀라며 말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선언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듯,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는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소유를 포기하며, 오직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천국은 헌신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릴 만큼 가치 있는 보배로 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결론: 포기함으로 얻게 되는 참된 영생
본문의 마지막 장면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보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포기의 대가로 보상을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삶의 기초를 내려놓은 자는 이미 그 나라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의 공급자가 되신다는 약속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결국 이 본문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있으며,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를 용기가 있는가?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온전히 주님께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오늘도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과 방향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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