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장 강해

고린도전서 4장 개요

1절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같은 말이다. 복음은 공개된 비밀이다. 우리는 비밀이란 단어를 신비롭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복음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으로 절대 볼 수 없기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어 있다.

2절 충성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맡은 자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것이다. ‘맡은 자’는 사명자를 뜻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충성’을 통해 평가된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판단하지 말라


고린도교회의 치명적 단점은 ‘판단’ 서로를 자신의 잘못된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죄를 지적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타인의 헌신과 은사에 대해 사람들이 판단하면 안 된다. 은사를 주신 주님이 하실 일이다.(4절) 주님이 오시면 그 때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

6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악한 자들은 교만한 자들이고, 교만한 자들은 순종하지 못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의 경계를 넘어선다. 처음 그 경계를 넘었던 자들은 아담과 하와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정신이다.

7-13절 만물의 찌기가 되었다.


이 부분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비아냥? 거림이 느껴진다. 바울은 단단히 화가 나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복음이 어떻게 해서 너희들에게 도달했는지 아느냐? 복음의 가치를 너희가 아느냐?라고 묻고 있다. 이 단란은 15절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의 설명이다.

14-15절 내 사랑하는 자녀


복음으로 낳았다는 말은 사람의 말이나 교묘한 술수로 유혹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8-21절) 바울은 ‘자녀’라는 표현으로 ‘내가 너희를 얼마나 아끼는 지 아느냐’고 묻고 있다. 이것이 목회자다. 목회자는 잡스러운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다. 목회자는 분주한 행사로 정신을 빼놓는 사람도 아니다. 목회자는 아버지이어야 한다.

16절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어떤 목사가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까? 참으로 가슴 아픈 말이다. 목회자들이 이렇게 타락했다. 나 또한 이 말에 자신이 없다. ‘나를 본 받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진심으로….

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


능력은 ‘뒤나미스’다. 바울이 굳이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할까? 말과 능력의 차이는 말은 거짓과 허상이고, 능력은 행동과 실천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말 장난하지 말고 실제로 너희 믿음으로 보이라는 야고보의 말처럼 강직하고 단호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 삶이다. 말 장난이 아니다.

강해


고린도전서는 1:1-9은 인사와 서론에 해당되고, 1:10-4:21까지는 고린도교회의 첫 번째 문제인 분쟁을 다룹니다. 4장은 분쟁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며, 지금까지의 분쟁에 관련된 것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1장에서는 분쟁의 양상과 해답으로서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2장에서는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보이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3장에서는 분쟁의 이유가 된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하니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제 4장에서는 ‘나를 본받으라’(16절)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4장을 구분했습니다.

1-5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라

6-13절 진정한 사도권의 표지들

14-21절 부탁과 권고

1-5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라


바울은 사역자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일꾼’(1절)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소개합니다. 아니, 그렇게 여겨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에는 삶이 원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원인과 목적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갑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2절)입니다. 바울은 충성을 ‘판단’(3절)의 문제와 연결시킵니다. 충성은 주인에 대한 것이지만, 판단은 주인이 종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3절)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심판의 권한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4절)

모든 판단이 주님께 있다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3절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일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말하며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4절에서는 주님만이 나를 심판하실 것이라 말하며 모든 판단의 여지를 주님께 맡깁니다. 5절에서는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드려내시고 각 사람에게 칭찬을 하시리라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자신의 신앙이 옳다면 우리를 판단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종을 판단하시는 이는 오직 주인이듯, 사역자들을 판단하는 이는 오직 주님이시다”


1-5절의 숨겨진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분쟁의 이유 중 하나는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달리 권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동행하지도 않았고,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체험이지 예루살렘에 있던 다른 열두 사도의 인증이나 교회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을 읽을 때는 여러 곳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9장에서, 고린도후서에서는 11장에서,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자신의 사도직은 강력하게 변호합니다. 이렇게 보면 4:1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달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이 중요한가. 그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을 의심하면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제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표지들을 소개합니다.

6-13절 진정한 사도권의 표지들

바울은 6-7절에서 다시 분쟁의 문제로 되돌아 갑니다. 그들에게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6절)고 경고합니다. 이건 확실히 경고처럼 보입니다.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나(바울)와 아볼로’에게 배웠으니 그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 7절에 의하면 말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성도끼리 서로 ‘구별’(7절)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구별은 3:3에서 언급한 대로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모든 것을 허락하셨음에도 그들은 다른 성도가 가진 것을 보며 시기했고, 탐했습니다. 또한 그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악순화는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8절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배 부르며 풍성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9-13절까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교만과 자기자랑에 빠져 있는 동안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 소개합니다. 9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었습니다. 또 ‘구경거리’가 되게하셨습니다. 13절에서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모습입니다. 특히 9절의 상황은 원형 경기장에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끌려들어가는 사형수와 같은 모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 가장 미천하고 위험하고 비참한 삶을 기꺼이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이제 6-8절의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습과 9-13절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께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바울이 당해야 했던 그 수많은 헌신과 사랑, 그리고 낮아짐을 기억해 봅시다. 주님 때문에 어리석어지고, 주님 때문에 비천한 자리로 나아가고, 성도들을 위해 주리고 헐벗고 매 맞고 정처 없이 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도의 표지요,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저는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밀려옵니다. 성도들이 수고하고 힘들어 할 때 목사인 저는 오히려 배부르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지 않는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14-21절 부탁과 권고


바울은 책망조의 자기소개를 마친 다음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4절) 15절은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할 본문이며 특히 교역자들은 깊이깊이 새겨야할 말씀입니다.

  •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은 있지만 아버지는 많지 않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접하면서 나는 과연 영적인 아들이 있는가 물었습니다. 진정으로 말씀으로 낳은 영적 자녀들 말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거듭난 성도들이라도 제가 진심으로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목사의 본을 보였는가 물었습니다. 절대 ‘그렇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성도님들이 저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것 같고, 권사님이 저보다 더 봉사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과분하게 사랑 받는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를 자신을 대신해 고린도교회로 보냅니다.(17절) 디모데는 바울이 ‘가르치는 것들을 생각나게’(17절)하려는 목적으로 보내집니다. 온순하고 내성적이었던 디모데는 강력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차분히 성경을 강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교만한 자들에게 대해 경고하고 4장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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