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장 강해

고린도전서 14장 예언과 방언

14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13장을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14:1절 상반 절에 ‘사랑을 추구하며’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추구하라(διώκω)’라는 동사는 마태복음 5:10,11,12,44에서 ‘박해하다’의 뜻을 번역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 6:11에서 ‘따르라’로 번역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12에서는 ‘붙잡으려고 달려간다’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뭔가를 얻기 위해 온힘을 다해 추구하고 쫓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데이비드 갈런드는 바울이 ‘추구하라(διώκετε 디오케테)’라는 동사를 ‘영적 노력에 대한 은유로 빈번하게 적용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노력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14장에서 예언과 방언의 관계를 다룹니다. 14장은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구조

1절 서론: 사랑을 추구하라

2-5절 방언과 예언의 일반적인 주장

6-40절 방언과 예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

먼저 용어를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방언은 원어적으로 그냥 지방언어를 뜻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 의하면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방언하는 자와 통역하는 자, 그리고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현들은 방언이 일반적인 일상의 언어를 뜻하는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인 방언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바울은 방언함을 멸시하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언하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언이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1:9-11에 의하면 아가보 선지자가 유대에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합니다. 즉 미래의 일을 언어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12:6과 고린도전서 2:6-16에 의하면 예언은 구약 성경은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일체의 선포 행위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예언을 현대적 의미에서 ‘설교’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방언과 예언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것이 충분해 보입니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


다시 1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1절 하반절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가르치고 풀어 해석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언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3절에 보니,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합니다. 4절에서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6절 말씀에 의하면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 있게 잘 해석하고 알아듣도록 풀어주는 것을 말함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교회에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12절에서도 보십시오. 예언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재차 반복합니다. 19절에서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다 말을 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24-25절에 의하면 예언을 통해 불신자나 무지한 자들이 듣고 책망을 받고 판단을 받아 자신들이 마음 속에 숨겨진 일들이 들어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작용해 그들로 하여금 숨겨진 죄와 악들을 깨닫고 회개하여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하는 것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4장을 마무리하면서 39절에서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방언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방언하기를 갈망하라.


다시 39절로 가봅시다. 바울은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즉 방언도 교회에 필요한 것이며, 중요한 은사임이 분명합니다. 방언의 몇 가지 특성을 살펴 보겠습니다. 고전 14장에 나타난 방언은 일반인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가정 하에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방언은 2절에 의하면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합니다. 그래서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합니다.

두 번째, 방언은 4절에 의하면 교회의 덕이 아니라 ‘자기의 덕’을 세웁니다. 방언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세 번째, 5절에서는 바울은 만약 방언이 통역된다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로 인해 방언의 은사는 통역의 은사가 있을 때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방언은 예언보다 우월한 은사는 아닌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갈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나님과의 깊은 내면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은 어제 말씀드린 대로 바로 ‘프뉴마(πνεῦμά)’입니다. 이 단어는 성령으로 번역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로마서 8:26-27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기도는 우리가 이성과 지성을 통해 또박또박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가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직접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성경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종종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의도치 않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반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우리 안의 영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말합니다. 방언이 비록 교회에 덕을 세우지는 못하지만 개인의 깊은 영이 하나님께 고백됨으로 지성과 이성을 뛰어넘는 교제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모일 때’ 즉 예배할 때 다양한 은사들이 있고, 은사들은 덕을 세우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각각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이 덕을 세우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만약 통역이 없다면 공개석상에서는 방언하면 안 됩니다. 28절에서 바울은 이 부분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마무리

고린도전서 14장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4장의 전체의 내용은 말에 관한 것입니다. 예언이든 방언이든 그것을 말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서를 따라야하고,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결국 바르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며, 성경의 말씀을 해석하여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책망과 깨우침을 얻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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