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장 강해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와 성령

12장부터 14장까지 세 장에 걸쳐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주에 말쓰드린 것처럼 12-14장 은사를 다루면서 가장 중요한 장은 13장으로 사랑에 대해 다룹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다 갑자기 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13장을 빼고 12장에서 곧바로 14장으로 이어 읽으면 내용이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어떤 면에서 13장은 굉장히 어색한 장입니다. 어색하다는 말은 논리적이고 순리적이 것이 아니라 바울의 격앙된 감정이 드러나 감정이 통제가 잘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맞을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로 은사가 아니라 사랑이 전제된 은사입니다. 그렇다고 은사가 나쁜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가 없다면 교회는 바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 지체들에게 준 선물, 즉 은사입니다. 이제 그 이유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장에서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몸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나갑니다. 저는 12장을 아래와 같이 구분했습니다.

1-3절 은사의 전제

4-11절 다양한 은사와 통일성

12-31절 몸의 비유로 본 은사

1-3절 은사의 전제

먼저 1-3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1-3절에서는 은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번역상의 약간의 모호함이 있어서 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1절에서 ‘신령한 것’으로 표현된 것은 영어 NIV 성경에서는 ‘spiritual gifts’로 번역합니다. 즉 영적 은사를 말합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πνευματικῶν’인데 이것은 ‘신령한 것들’로 되어 있습니다. ‘신령하다’는 표현이 신령(神靈)이란 한자어를 빌려와 번역했기 때문에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신령’이란 헬라어는 ‘프뉴마’를 말하며 ‘바람’이나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를 헬라어로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신령한 것들’을 하나님께 속한 것들로 번역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 2-3절을 보겠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거듭나지 않았을 때 우상에게로 끌려갔다고 2절에서 말하고, 3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저주할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3절 후반부에서는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1절의 프뉴마가 3절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바울은 지금 영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면 예수는 저주 받은 자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의 주가 된다고 고백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도무지 주제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2-3절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신령한 은사의 전제 또는 조건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저주할 자로 말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은 저주 받아 마땅한 자로 이해하여 십자가의 죽음이 말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대속 죽음을 무효화시킵니다. 자신이 저주 받아 죽었는데 어떻게 타인은 살릴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그 단계를 넘어 좀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하나님의 영’ 또는 ‘성령’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주어진 은사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즉 은사는 개인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단락에서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데이비드 갈런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장은 공동선을 위해 성령께서 각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영적 은사의 할당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롬 10:9)라는 구원하는 고백을 하는 사람은 모두가 성령에 의해 이끌리며, 영적인 자들로서의 가격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출발한다.”

4-11절 다양한 은사와 통일성

4-11절은 다양한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성령’에서 은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에서도 ‘주는 같으며’, 6절에서는 ‘하나님은 같으니’ 라고 말합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다양한 은사를 말하고 있지만 핵심은 바로 ‘한 성령’입니다. 궁극적으로 은사는 다양할 수 있으나 동일한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종종 3절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사도행전 16:7에 의하면 ‘예수의 영’으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12-31절 몸의 비유로 본 은사

이제 세 번째 단락으로 넘어갑니다. 12-31절은 다양한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교회론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몸’이란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12절에서는 ‘몸은 하나인데’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13절에서는 ‘한 몸이 되었고’ 14절, 15절, 16절, 17절 18절, 19절, 20절, 22절, 23절, 24절 계속 이어집니다. 몸은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라고 말합니다. 한 몸에 손이나 발, 눈과 코 등 다양한 지체가 있듯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비유에서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ㄱ. 서로 필요의 원리

15-21절에서는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이 발더러 ‘넌 더러우니 몸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눈이 입에게 ‘너는 맛있는 것만 먹는 식충이야’라고 비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입이 없다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결국 눈도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보지 못하고 온 몸은 죽고 말 것입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취향과 다르다고 서로 삿대질 한다면 몸은 고통에 빠질 것이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은 다양한 은사를 가진 이들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이들을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주심으로 한 몸을 이루어 가게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ㄴ. 약자 가치의 원리

두 번째 교훈은 ‘약자 고가치의 원리’입니다. 약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월등한 가치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요긴하고, 덜 귀히 여기는 것들이 더욱 귀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강한 것을 찾고, 탁월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반대로 갑니다. 약하고 추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모여 있고, 그들이 함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1:26-29로 돌아가 봅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ㄷ. 균등(均等)의 원리

세 번째 원리는 균등의 원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서로 다르고,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균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 몸을 고르게 하여’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형제끼리는 서로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부유한 아들의 재산을 가난한 딸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귀한 자녀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사랑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통해 ‘여러 지체가 서로 돌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고든 피는 은사는 ‘교회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마무리

은사는 한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Views: 70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