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성령을 따라 사는 삶
6장은 5:16부터 시작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5:16에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고 권면했고, 5:25에서 다시 ‘성령으로 행하라’라고 권면합니다.
Ⅰ. 성령을 따르는 삶
- 5:25-6:5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
- 6:6-10 나누는 삶
Ⅱ. 율법과 십자가
- 11-16 할례와 십자가
- 17-18 마지막 인사
- 성령을 따르는 삶
성령을 따르는 삶
5:25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라고 말합니다. 난해해 보이는 이 구절의 뜻은 “‘너희들이 성령을 따라 살고 있어’라고 말한다면 성령으로 사는 삶의 열매를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즉 마음이나 생각이 아닌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궁극적인 의미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산다는 증거는 바로 말씀에 합당한 삶입니다. “성령의 너희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 증거를 대라”를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성령이 우리를 인도한다면 성령이 그에 합당한 열매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5절 후반부의 ‘행한다’는 헬라어 ‘스토이케오(στοιχέω’는 ‘열지어 세워지다’이며, 군사들이 정렬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령과 삶이 일치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성령을 따른다 하면서도 성령이 원하지도 않고, 성령과 일치하지 않는 삶은 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성령과 함께 걷다(in step with the Spirit)’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에녹이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동행한 삶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5:26-6:10에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ㄱ.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26절)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전제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헛된 영관’이란 헬라어 단어는 ‘케노독사스(κενόδοξας)’입니다. 이 단어는 ‘비어있다’는 뜻의 ‘케노스(κενός)’와 영광이란 ‘독사(δόξα)’가 결합된 합성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실상은 전혀 그런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자신이 칭찬과 명성을 얻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말합니다. 바울은 헛된 영광을 구함으로 말미암아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도전하고, 타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것을 갖고 싶어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기’ 또는 ‘투기’라고 말합니다. 도전과 투기를 하게 된 이유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쟁이 아니라 섬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합니다.
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
6:1에서 바울은 범죄한 사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제시합니다. ‘신령한’는 영적인 것,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면’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6:1은 바로 앞 절인 5:26을 설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슈라이더라는 학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신자들은 죄 가운데 넘어진 신자를 친절하게 회복시켜야 한다. 신자들은 서로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노하게 하며, 질투하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목표가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죄를 지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다룰 때가 있습니다. 엄하게 야단을 치거나 비인격적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세를 전혀 옹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할 때라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과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 받은 존재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5:23을 보시면 온유도 성령의 열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ㄷ. 서로의 짐을 지라.(2, 5절)
6:2에서 바울은 ‘짐을 서로 지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βάρη)’은 1절에서 언급된 다른 성도들의 죄와 관련이 있으며, 성도의 슬픔과 아픔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타인의 죄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눌 때 역시 희생이 따릅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오직 성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율법(τὸν νόμον τοῦΧριστοῦ)’을 뜻하지만,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바른 삶을 의미합니다. 더글라스 무가 언급한 것처럼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은 사랑의 형태이며, 그로 인해 율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바울은 타인의 짐을 자기 전에 또 하나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자신을 먼저 ‘설펴보고(1절)’ 타인의 짐을 질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것입니다.
ㄹ.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나누라(6절)
설교자의 입장에서 말하기 참으로 곤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왔으니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영적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가르치는 자들을 마땅히 대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5장으로 가면 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해 연보를 언급하면서 마케도냐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받고 육적으로 갚았다고 말하면서 구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롬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린도전서 9장으로 돌아가 보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영적인 것을 뿌렸으니 육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약간 길지만 고전 9:7-12까지 읽어 드리겠습니다.
[고전]9:7-12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어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은 복음은 공짜기 때문에 돈을 받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들으면 상당히 매력적이고 성경적인 주장인듯 하지만 실은 성경에 대해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24시간 교회를 위해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돈을 한 푼도 주지 않고 해보라고 하십시오.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럼 다른 무엇을 먹고 일하며, 자녀들은 어떻게 양육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1-3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8:1-3]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복음은 공짜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절대 무책임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마땅히 책임을 지고 공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말씀 전하는 자들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목사가 무한히 희생해야 되는 존재로 보거나, 교회를 서비스 센터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무례하고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목회자를 섬기고 성도를 돌보는 일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8절)
율법과 십자가
이제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율법과 십자가의 문제를 한 번 더 언급합니다. 12절을 보면, 할례를 받는 이유를 박해를 면하게 하려는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할례는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유대인처럼 만들어 불필요한 잡음을 없애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시도가 반기독교적이며, 반복음적이라는 것입니다. 13절 후반분에서 바울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선언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아마도 갈라디아인들에게 율법을 행하게 하여 자신들의 파를 만들고, 유대인들과 친목을 도모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가식적인 교사들이었고, 갈라디아교회 서도들을 바울과 이간질 시켜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림으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세상 또한 십자가와 달린 사람과 완전한 결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믿는 성도들에게 전가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τὰ στίγματα τοῦ Ἰησοῦ)’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는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긴 몸의 상처들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1로 가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4:10-11]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두 번째는 고대 세계에서 노예들이 했던 바로 그 흔적입니다. 노예의 몸에 주인의 고유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죠. 바울은 이 흔적을 염두에 두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할례는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흔적은 옛 언약으로 돌아가려는 영적 퇴보이자 사단의 계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진정한 흔적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흔적, 스티그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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